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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기억하지? 그거면 됐다 [영화]

Pablo Berger, (2023), <Robot Dreams>

by 한정아 에디터
2026.05.01 13:54

 

 

확실하게 하는걸 좋아하는 편이다. 조별과제가 끝난 뒤에는 회의록을 보내야만 하고, 싸우고 나서는 꼭 화해하고 넘어가야 하고, 속에 있는 생각의 응어리는 해부하여 끝을 닫아야만 잘 수 있었다. 계획적이거나 체계적이라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매듭 풀린 것들이 헤엄치는게 버거워서였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지, 아니면 날씨가 풀려서인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내가 매듭을 묶지 않아도 세월이 해결해주는 것들이 있고, 굳이 들추어 내 정면 돌파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결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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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어에 그치는 대사만이 존재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 을 보면, 이런 나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다. 여기 로봇과 도그(개)가 있다. 그들은 한 계절을 함께 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헤어졌다. 어떻게 그들이 만났고, 어떻게 함께 했으며, 어떤 상황에 의해 헤어졌는지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겠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 년이 지나, 이제 각자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그들. 로봇은 도그를 우연히 보게 된다. 도그도 나를 기억할까, 불러 세우면 날 반가워해주지 않을까, 새로운 로봇을 만나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어쩌지- 하며 끊임없이 상상해온 과거의 시간들이 스쳐지나가는 듯하다. 결국 로봇이 선택한 것은 과거에 했던 그 상상(Dream) 어디에서도 하지 않은 행동이다.


로봇은 도그가 자신을 볼 수 없도록 숨은 채, 함께 춤을 추던 노래를 튼다.

 

 

 

 

Do you remeber?

Dancing in September

Never was a cloudy day 

...

Rememer how we knew love was here to stay

 

- Earth, Wind & Fire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같은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는 로봇과 도그. 서로 다른 배경이지만,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때를 하염없이 되돌아보게 했던건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다.


너도 즐거웠지? 너에게도 그 시간들이 소중했지? 를 확인 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함께 공유하던 그때가 있었지? 를 묻고 싶은 것이다. 당장 달려나가 길을 가던 도그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울 수 있었지만, 로봇은 먼 곳에서 그저 노래를 튼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인 도그의 춤은, 모래사장에 묻혀 기다리기만 했던 로봇의 지난 1년을 치유하기에 충분하다. 이러쿵 저러쿵 쏟아내는 말 없이도, 그 시간에 대한 공동의 긍정을 느낄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해버린 끝이 아쉽지만, 매듭 묶지 못한 채 얼렁뚱땅 지나간 관계가 슬프지만, 그런대로 묻고 넘어가야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세월의 흐름에 종이배로 띄워 흘려보내는 것이 좋은 것들이 있다. 성사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의미가 없거나 실패한 관계가 아니다. 어쩌면은 정반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 때에 최선을 다해 임하면 된다. 그리고 때가 지나면 놔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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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넌 샛길 아니야

네가 내 인생이야

그렇다고 함께해야 하는 건 아니지

언제까지나 널 사랑할게

 

- Orange is the new black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구성하던 것들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그리고 그 변화가 삶의 궤적이자 우리의 본질이다. 라스칼(너구리)에 의해 새로운 몸으로 탄생한 로봇을 보면 더 크게 체감할 수 있다. 로봇의 새 몸인 뮤직박스 안에는 도그의 최애곡과, 라스칼의 최애곡이 모두 담겨있다. 로봇은 이제 라스칼이 아프지 않게 손을 살포시 잡고, 도그는 새로운 로봇이 고장나지 않도록 기름 스프레이를 뿌려준다. 그렇게 배워간다.

 

나를 스쳐지나간 건 어떤 형식으로든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몇년만에 자전거를 타도 여전히 넘어지지 않게 잘 타고,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3학년 4반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도 유치원 졸업식에서 혼자 울진 않았을 것이다.


로봇과 개의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상상(Dream)하게 만든다. 연인이 될수도, 친구가 될수도, 가족, 혹은 반려동물, 아니면 아끼던 물건이 될 수도 있는 수많은 만남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 먼 곳에 있어도 공유하는 그 때. 우리 모두 각자만의 September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따듯 아릿한 <로봇 드림>을 이별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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