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이는 일, 그 작고 확실한 기쁨
— 정고메 작가의 『제철 채소 먹는 기쁨』
올봄 SNS 피드에 갑자기 초록빛이 넘쳤다. 봄동 비빔밥, 달래 간장, 냉이된장국. 늘 고기와 치킨으로 가득하던 SNS 화면이 어느 날부터 채소 사진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시적인 유행이려니 했다. 그런데 봄동 비빔밥 사진 앞에서 내 손이 잠깐 멈췄을 때 떠오른 건 ‘맛있겠다’가 아니었다. ‘맞아, 이거였지.’ 오래 잊고 지낸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밥상을 다르게 차렸다. 봄이면 냉이와 달래가 빠지지 않고 인사하고, 무더운 여름이면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수를 꼭 먹었다. 가을에는 땅의 힘을 간직한 채 나오는 뿌리채소들이 식탁을 채웠고, 겨울 저녁에는 달큼한 무 요리가 올라왔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일 년을 느끼는 엄마만의 방식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 밥상을 내가 만들고, 차리고, 뒷정리까지 해야 했다.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배달앱이 가장 쉬운 선택이 됐다. 30분이면 문 앞에 뭔가 도착하는 세상에서 채소를 씻고 다듬는 일은 자꾸 뒷전으로 밀렸고, 그렇게 해결한 끼니들은 배를 채워줬지만 어쩐지 ‘내가 나를 위했다’라는 기분을 주진 못했다. 그리운 건 집밥에서 빼놓지 않고 올라오는 제철 나물 한 접시였다. 그건 배달로 오지 않았다. 피드에서 마주친 그 초록빛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다, 이 책을 만났다.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하는 사람
저자 정고메(정혜성)는 퇴근 후에도 밥을 해 먹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도시락을 싸 다닌다. 그 생활이 10년이 넘었다. 블로그와 X(트위터)에 채소 집밥을 꾸준히 기록해 왔고, 그중 ‘깻잎 냉파스타’가 입소문을 타면서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 책이 여느 요리 에세이와 다른 지점은 저자의 출발점에 있다. 거창한 계기나 미식에 대한 철학 대신, 내세우는 건 단 하나다.
“집밥에서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은 오늘 무너지더라도 내일부터 다시 하지 뭐 하고 가볍게 넘기는 태도.”
집밥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가 요리 실력이 아니라 완벽주의에 있다는 말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 다시 요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밑반찬이 식탁 한가운데로 오는 과정
책을 읽으면서 묘하게 구성이 세심하다는 걸 알아차리게 됐는데, 한참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이 책이 채소를 소개하는 순서가 우리가 사람과 친해지는 순서와 똑같기 때문이었다. 가장 익숙한 것에서 시작해,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고, 마지막엔 이 모든 걸 우리의 일상에 함께하는 방법으로 마무리된다. 그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채소가 어느새 낯설지 않아진다.
처음 만나는 건 열무, 깻잎, 무, 대파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재료들이다. 마트 채소 코너를 지나칠 때마다 눈에 들어오지만, 늘 같은 방식으로만 써왔던 것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이 재료들이 의외의 얼굴을 꺼내 보인다. 항상 쌈 채소로만 놓이던 깻잎이 냉파스타가 되고, 국물 낼 때나 쓰던 무가 달큼함을 끌어낸 우동 한 그릇이 된다. 레시피와 함께 각 채소가 품고 있는 영양소도 짚어주는데, 맛으로 먹기 시작해서 몸까지 챙길 수 있는 구성이다.
그 설렘은 더 낯선 재료들로도 이어진다. 봄나물, 해조류, 토마토, 새송이버섯. 저자가 익숙한 조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내 안에 있던 요리 세포가 꿈틀거리는 발견이 이어진다. 빈혈, 뼈 건강, 비타민 ACE까지, 따로 영양제를 챙기는 것보다 제철 채소 한 접시를 더하는 게 오히려 더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마지막 파트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일상에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화려한 레시피보다 이 챕터들에서 오히려 더 오래 머물게 됐는데, 집밥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는 대목이 특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요리사는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 한 번에 다 잘되는 게 아니라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기쁨, 그게 저자가 집밥을 대화는 태도이기도 하고 삶을 대화는 방식이기도 하다. 계절을 느끼기에 제철 채소만 한 것도 없다는 것도 이 부분에서 다시 확인했다. 그때 그 순간을 붙잡는 일들이 쌓일수록 시간이 더 촘촘하게 느껴진다는 것, 집밥이 그걸 가능하게 한다. 책의 구성 자체도 그 마음을 반영하듯, 각 챕터마다 QR코드가 있어 냉장고에 남은 재료가 생각날 때 바로 펼쳐보면 된다.
채소로 연결되는 것들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구절은 깻잎 냉파스타를 이야기하는 챕터에 있었다. 음식 하나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식탁에 오르고, 그것을 직접 손질하고 요리할 때 우리는 그 흐름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음식 하나로 이렇게 많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 직접 손질하고 요리하는 사람에게만 닿는 자리다.
그 시선은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먹는가는 결국 어떻게 나를 대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직접 제철 채소를 사다가 며칠 해 먹어보고 나서 이 말이 달리 읽혔다. 채소를 씻고 다듬고 팬에 올리는 그 시간은, 하루 중 나를 가장 성실하게 돌보는 시간이 됐다. 거창할 것 없이, 그 20분이면 충분했다.
*
봄이 한창이다. 냉이, 달래, 봄동, 마늘종. 지금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것들이 마트 채소 코너에 나와 있다. 제철 채소를 직접 손질하는 일은 지금 이 계절을 더 촘촘하게 붙잡는 방법이기도 하다. 채소 요리가 고기 요리보다 더 어렵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쩌면 더 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트에 가서 채소를 한 봉지 사보자. 그리고 나를 위한 밥을 한번 차려보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