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3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영화 <올란도>(Orlando)는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지금 막 만든 근작처럼 느껴지는 생명력을 지닌다. 본래 원작작 버지니아 울프가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에게 바치는 헌사로 쓰인 이 작품은, 샐리 포터의 탐미적 연출과 틸다 스윈튼의 존재감을 통해 시각적 시(詩)로 재탄생했다.

 


common-8.jpeg

ⓒ 영화 <올란도>(1992) 스틸컷

 

 

영화가 보여주는 뿌연 중성성은 울프가 평생토록 문학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양성구유의 정신 그 자체다. 성별과 시간을 넘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이 기나긴 여정을 그려내기 위해, 어쩌면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는 필연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아와 본질, 그 고유성


 

극 중 젊은 귀족 올란도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라”는 기묘한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400년의 시간 동안 그는 그 명령을 수행해 낸다. 그런 올란도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세상의 시간은 거대한 폭으로 흘러가는 데 반해 그가 가진 순수함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권력과 정복에 눈먼 소위 ‘남성적’ 에너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늘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관찰하며 시를 쓰는 그의 정적인 태도는 당대 남성들에게 요구되던 거친 야망 대신 모호함을 띠며, 성별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러한 내면의 중성성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을 통해 점차 외부로 발현될 조짐을 얻는다.

 

영화 중반부, 전쟁과 죽음이라는 남성 중심적 가치의 허망함을 목도한 뒤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마치 허물을 벗듯 자연스럽게 여성의 몸으로 깨어난다. 기이하고도 급작스러운 이 변화는, 올란도가 여성으로 변한 자신을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며 읊조리는 대사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 당위성을 얻는다.

 

 

“변한 건 없어. 똑같은 사람이야(Same person. No different at all.)”

 

 

이 대목은 올란도의 본질이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원색적인 이분법 너머의 고유한 자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체라는 껍데기는 바뀌었을지언정 세상을 관조하는 투명한 영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관객 또한 바뀐 올란도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common.jpeg

ⓒ 영화 <올란도>(1992) 스틸컷

 

 

 

버지니아 울프의 '양성구유(Androgynity)' : 가장 높은 단계의 자유


 

여기서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가 평생을 걸쳐 강조했던 양성구유(Androgynity)의 정신을 마주하게 된다. 울프에게 양성구유란 단순히 생물학적 특징의 결합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녀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각자 안에는 두 개의 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남성적이고 하나는 여성적입니다. [...] 작가인 자는 누구나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어야 하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어야 합니다.”
 

 

울프에 따르면 위대한 정신은 양성적이어야 한다. 어느 한쪽 성별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독 샐리 포터 역시 단순히 남장 여자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 성별 초월의 존재 자체를 형상화하기 위해 올란도가 남성일 때조차 중성적 미묘함을 유지하도록 연출하며 울프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common-13.jpeg

ⓒ 영화 <올란도>(1992) 스틸컷


 

 

포용과 관조의 정신으로 탈피하기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올란도는 4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랑과 성(性)을 맞닥뜨리며 사회적 대본을 벗겨내고 마침내 온전한 자기 자신(Ego)에 다가간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 1세 시대는 남성 귀족들이 화려한 화장을 하고 스타킹을 신는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소위 ‘여성스러운’ 이 복식은 올란도의 중성적 매력과 맞물리며 ‘남성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의 정의가 얼마나 가변적인 개념인지를 시각화하는 것이다. 화장과 액세서리로 치장하던 남성 귀족의 시대부터 코르셋으로 시대의 굴곡에 몸을 맞추던 여성의 시대까지, 올란도는 이 가변적 정의의 챕터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대본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양성구유는 단순히 성별을 섞는 개념이 아니다. 어느 한쪽의 편견에 매몰되지 않는 완전하고 투명한 정신, 즉 ‘포용의 언어’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온전한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울프의 제언은 현대 사회에도 유효하다. ‘테토남’이나 ‘에겐녀’같은 납작한 단어로 타인을 정의하고 규정하고 분류하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분류되지 않은 더 많은 고유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여정에서 시(詩)는 존재를 말하는 도구가 된다. 올란도가 400년 동안 시를 쓰며 고뇌한 끝에 현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책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그가 양성구유의 정신을 온전히 체득하여 존재의 본질을 언어로 길어 올렸음을 의미한다.

 

 

 

비(非)시간적 자기 긍정


 

영화 <올란도>는 한쪽을 선택해 나머지를 버리는 극단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양쪽을 모두 품은 ‘구유(具有)’의 정신으로 삶의 형태를 관조할 뿐이다. 인간의 고유성이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 성숙한다는 생각은 오류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자기 긍정의 서사는 시간의 길이와 별개로, 마주하는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일깨운다. 버지니아 울프가 문학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그 투명한 정신은, 이제 스크린 속에서 카메라 너머 관객을 응시하는 시선을 통해 우리를 포용한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