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진지한 것보다 유머를 좋아했다. 시의적절한 '유머'는 때로 진지한 대화보다 더 뼈를 때릴 때가 있다. 그 유머를 통해 다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풍자'라고 한다.
얼마 전, 개그맨 이수지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 <휴먼다큐 진짜 극한직업> 코너에서 유치원 교사의 하루를 연기해 큰 화제가 됐다. 실제 유치원 교사들은 그 영상을 보며 눈물로 공감했다고 한다. 심지어 현직 교사들은 댓글을 통해 이수지가 연기한 유치원 교사가 오히려 '순한 버전'이라고까지 했다. 필자 역시 성당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아이들보다 학부모 눈치를 보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경험이 있기에, 깊이 공감이 갔다.
이수지의 채널은 유치원 교사 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의 불편한 진실을 콕 집어 연기로 풀어내는 그의 영상에는 "이수지가 한번 하면 그 행동을 다시는 못 하겠다"는 댓글이 어김없이 달린다. 웃음이 경고보다 더 강하게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는 비단 오늘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로부터 광대들은 왕이나 권력자, 사회의 모순 앞에서 풍자와 해학을 통해 유일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직언은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웃음으로 포장된 말은 때로 권력의 심장부까지 닿을 수 있었다.
영화 <왕의 남자>는 그 사실을 역사 속에서 건져 올린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1505년 12월 29일)에 단 한 줄로 기록된 광대 공길의 이야기 —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고 말했다가 벌을 받았다 — 에 매료되어, 김태웅 작가의 연극 <이爾>를 원작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영화화했다. '가장 낮은 곳의 광대가 가장 높은 곳의 왕을 풍자한다'는 이 서사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특히 잔인무도한 연산군이 미천한 신분의 광대 공길에게 점차 빠져들다 결국 파국에 이르는 결말은 누군가를 웃겨야 하는 광대의 운명과 권력을 잃어가는 왕의 비극이 뒤섞여 실로 우스꽝스럽지만 내면으로는 지독히 비참한 풍자의 속성을 묵직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광대, 즉 조커의 역할은 카드게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카드 게임에서 조커는 앞 사람이 낸 카드의 문양이나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낼 수 있다. 심지어 상대가 공격 카드를 냈을 때 조커로 받아치면, 그 공격을 무력화하는 것은 물론 더 강한 숫자의 카드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 판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도 있다. 다 이긴 것 같은 판을 뒤집고, 꼴찌를 면하게 해주는 감초 같은 존재 — 그것이 바로 조커다.
우리 사회에서 예술과 코미디가 수행하는 역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두가 정해진 규칙과 서열에 묶여 침묵할 때, 광대의 탈을 쓴 조커들은 판의 흐름을 끊고 금기시된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수지의 연기에 눈물 지은 유치원 교사들의 공감이나, 연산군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만담을 멈추지 않았던 공길의 용기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선다. 그것은 굳어버린 현실의 질서를 뒤흔들어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가장 강력한 공격 카드인 셈이다.
<왕의 남자>가 고전의 틀 안에서 풍자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나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 같은 현대 영화들은 그 시선을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금의 현실로 돌린다. 이들은 계급 갈등이나 정치적 무관심 같은 무거운 시대적 모순을 날카로운 풍자로 버무려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웃음 뒤의 서늘한 성찰'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풍자의 파동은 비단 스크린 안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의 담벼락을 넘어선다.
얼굴 없는 아티스트 뱅크시(Banksy)는 거리의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자본주의와 전쟁, 권력의 부조리를 한 점의 그림으로 비웃는다. 소더비 경매장에서 낙찰 직후 스스로 파쇄된 그의 작품은 당시 큰 충격을 안겼고, 지금까지도 예술과 자본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시대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이어져 온 풍자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우리가 외면해 온 질문들을 다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누구든 동등한 존재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화와 예술의 영역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풍자의 대상은 권력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수지가 극성 학부모를 연기로 꼬집었듯, 유머는 우리 일상 속 크고 작은 모순들을 향해서도 날을 세운다. 최근 MZ세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는 어른들의 뼈 있는 말을 '꼰대질'로 치부하거나 아예 귀를 닫아버리곤 한다. 하지만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어느 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가 넘쳐나고 알고리즘이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여주는 시대, 개인과 집단은 점점 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상대의 말에 귀를 닫는다. 그리고 그 간극은 어느새 갈등으로 번진다.
우리는 흔히 유머를 진지한 대화와 구별되는 '가벼운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경계심 없이 받아들인다. 바로 그 지점이 유머의 힘이다. 진입장벽이 낮기에, 알고리즘과 확증 편향이 세운 견고한 벽을 뚫고 들어가 균열을 낼 수 있다. 정보의 과잉 속에서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지금, 풍자는 그 목소리들이 품은 허세와 가식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아무도 듣지 않으려 할 때, 웃음은 인간의 방어기제를 가장 먼저 조용히 무너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진짜 '깨어있는 것'일까 '깨어있는 척' 하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유머로 지적을 받았을 때 그것을 수용하고 고칠 용기가 있을까? 한번 질문을 해보자. 타인을 향한 풍자에는 열광하면서, 정작 그 조커 카드가 나를 향할 때 우리는 과연 함께 웃을 수 있는 너그러운 사회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