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우리가 열광했던 영국 왕실의 삶은 화려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찰리 채플린의 명언에 가까운 삶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화려한 왕실 이야기였기 때문이 아니다. 매 시리즈마다 인물들이 왜 그렇게 감정을 숨기고 행동했는지 그 내면을 이해하게 만드는 탄탄한 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프라임타임 에미상, 골든 글로브, SAG 어워즈 등 다수의 국제적 수상을 통해 작품성과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이러한 서사의 힘을 증명했다.
그중 필자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낸 세 여성, 엘리자베스 2세, 마거릿, 다이애나를 중심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감정보다 제도를 선택한 여성,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왕실에서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물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Elizabeth II)이다.

<더 크라운>에서는 시대별로 그녀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배우가 엘리자베스를 연기했는데, 클레어 포이(Claire Foy)는 젊은 시절을, 올리비아 콜먼(Olivia Colman)은 중년 시절을, 이멜다 스턴튼(Imelda Staunton)은 노년 시절을 맡아 각 시기의 엘리자베스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에드워드 8세(Edward VIII)의 퇴위로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 조지 6세(George VI)의 곁에서 엘리자베스는 평범한 소녀가 아닌 '미래의 군주'로 길러졌다. 그녀는 대영제국의 전통 속에서 '의무'와 '책임'을 먼저 배웠다. 감정보다 역할을, 개인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교육을 받았다. 이는 훗날 그녀의 통치 철학이 되었고 어떠한 사건 앞에서도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철저히 중립을 지키는 태도로 이어졌다. 동시에 한 여성으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는 삶이기도 했다.
자유로운 동생 마거릿 공주와 대비되는 모습은 선명하다. 마거릿이 사랑과 감정에 솔직한 선택을 갈망했다면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해야 했다. 드라마에서는 그녀를 냉정한 군주로 그리지만, 그 냉정함은 권력의 차가움이라기보다 감정을 내보일 수 없는 자리에서 비롯된 절제에 가까웠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애버판 탄광 붕괴 참사다. 초등학교가 매몰되어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되었음에도 여왕은 즉각 현장을 찾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 뒤늦게 방문해 눈물을 보였으나 그 눈물조차 '연기였다'고 고백한다. 군주로서 감정까지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장례식에서 울려 퍼졌던 찬송가의 녹음본을 홀로 듣던 순간 그녀는 끝내 눈물을 흘린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은 강인한 군주의 얼굴 뒤에 눌러 담아야 했던 인간적인 슬픔을 조용히 드러낸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는 자녀들의 결혼과 파국을 지켜보며 왕실이라는 제도가 개인의 삶, 특히 여성의 삶에 얼마나 깊이 개입하는지 마주한다. 평생 '여왕'으로 살아왔지만 정작 '한 여성'으로 살아본 적은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순간들 속에서, 왕관은 존경과 권위를 주었지만 동시에 감정을 숨겨야 하는 삶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는 전통을 지킨 군주였으나 그 이면에는 여성으로서의 선택을 끊임없이 유예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왕관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고독하게도 만들었다.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고, 왕실에 익숙해져야 했던 공주 마거릿
마거릿 공주(Princess Margaret)는 순종적인 언니와 달리 자유분방하게 자랐음에도, 늘 여왕인 언니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삶을 시대별로 표현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바네사 커비(Vanessa Kirby), 중년을 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 노년을 레슬리 맨빌(Lesley Manville)이 맡았다.
화려한 왕실 생활 뒤에서 그녀는 사랑과 자유에서 제약을 받았다. 드라마에서는 피터 타운센드와의 관계를 통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할 수 없었던 상황이 그려진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은 그녀에게 큰 갈등을 안겼다.
마거릿은 자유로운 성향 덕분에 왕실의 엄격한 규율을 때로 비틀며 대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예컨대 미국 방문 당시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특유의 재치와 솔직함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며 외교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언니인 여왕은 엄격한 절제로 왕실의 품위를 지켰다면, 마거릿은 자신만의 거침없는 매력으로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 '비공식적 외교'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순종적인 언니와 비교되며 왕실 안에서 겉돌아야 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여왕의 그림자로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었다.
그림자처럼 살아온 그녀의 삶은 왕관을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엘리자베스와 대비되나, 그녀 역시 사랑과 자유에서는 완전히 독립적이지 못했다. 그러기에 다이애나 비가 겪는 상황을 바라보며 왕실 시스템의 잔혹함을 이해하는 장면도 암시되지만, 그녀가 직접 다이애나를 보호하는 장면은 이 시리즈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결국 그녀도 언니처럼 '개인의 행복을 희생하는 왕실 체제'에 익숙해짐을 보여주는 씁쓸한 인물 중 하나가 된다.
대중과 소통하며 왕실 시스템과 맞선 왕세자비 다이애나
<더 크라운> 후반부의 정점은 다이애나 비(Diana, Princess of Wales)이다.

드라마에서는 그녀의 젊은 시절을 엠마 코린(Emma Corrin)이, 결혼 생활 이후와 중년을 엘리자베스 데비키(Elizabeth Debicki)가 연기하며, 시대별로 다이애나의 복잡한 내면과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흔히 그녀를 '비운의 왕세자비'로 기억하나, 극 중 다이애나는 왕실 시스템의 잔혹함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시골 귀족 가문 출신인 그녀는 왕실 규칙이나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그저 사랑과 가정을 꿈꾸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남편 찰스 왕세자의 불륜과 냉담으로 마음고생을 겪고 왕실 내부에서는 "왕실이니 참아라"라는 식의 제한적 대응만 받는다. 이로 인해 다이애나는 수많은 가신과 가족들로 북적이는 왕실 안에서도 혼자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의 심리적 압박은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드러났고, 현실 도피를 위해 혼자 이어폰을 끼고 춤을 추는 모습은 고립과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혼 생활이 깨지고 별거를 시작한 후, 찰스가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불륜 관계를 공개하며 인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같은 시기 다이애나는 파티에서 '복수의 드레스(revenge dress)'를 입고 나타난다. 당시 짧은 치마와 깊게 파인 네크라인은 왕실 전통을 깨는 파격적 선택이었고, 다음 날 신문 1면에는 찰스의 해명 대신 다이애나의 드레스와 용기 있는 행보가 조명된다.
이후 다이애나는 찰스와의 '언론전쟁'을 벌임으로써, 왕실 내부에서는 불편한 존재, 대중에게는 감정이 살아 있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기존 왕실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며, 왕실 시스템의 잔혹함과 인간적 고뇌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준 인물이었다.
비록 다이애나는 끊임없는 언론의 관심과 파파라치에 시달리다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대중과 소통하며 왕실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했다.
침묵의 시대가 저물고, 목소리의 시대가 오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를 <더 크라운>을 통해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여도 안정된 왕실과 역할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개인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음을 보며,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엘리자베스 2세와 주변 왕실 인물들의 삶을 중심으로 그려진 시리즈다. 한 인물의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등 다양한 삶의 시기를 여러 배우가 연기하며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근현대사와 전통적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선택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특히 이 시리즈는 시즌 1부터 6까지 모든 포스터의 중심에 여성을 배치한다. 전통과 절제를 상징하는 엘리자베스 2세로 시작해, 마지막 시즌은 왕실에 저항하는 다이애나를 전면에 내세우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대비는 마치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더 이상 '침묵'의 규율을 따르는 전통적인 여성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감정을 절제하며 제도를 지켜낸 엘리자베스보다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체제에 질문을 던진 다이애나의 모습에 더욱 공감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관점에서 이 시리즈를 바라본다면, 단순한 왕실 드라마를 넘어 보다 다층적이고 확장된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