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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나’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발신인이 미래의 ‘나’인지조차 모르는 채로. 혹자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나라는 존재에 두근거림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대할 지도, 나는 모르는 나의 모습에 두 눈을 반짝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시작된다. 미래의 나, 네가 지금의 엉망진창을 그대로 안은 채로 하나도 자라지 않았으면 어쩌지. 그렇게 내가 되는 꿈을 꿨던 거였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어린 얼굴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33번째 소설 선으로 선보여진 최진영의 장편소설 <내가 되는 꿈>의 이야기다. 팍팍함을 넘어 괴롭힘까지 치닫는 직장 생활, 믿음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운 애인과 오랫동안 병환에 시달리던 외할머니의 죽음이 ‘나’, 태희의 삶을 ‘부러지기 직전’까지 내몬다.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을 끊어낼 행동을 유보하며 피곤한 삶을 살아내기에 급급했던 그는 1년 뒤의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는 편지를 우연히 쓰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어린 나’, 즉 어린 태희의 자기 서술이 시작된다. 어린 태희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님이 경기도와 부산으로 떠나며 별거하게 되면서 외할머니 집의 이모 방에 들어가 살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지나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는 수많은 수치심의 순간을 지나친다. 엄마와 아빠가 왜 떨어져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지를 고민한다. 알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내 안에서 사실로 ‘믿어지는’ 것들이 늘어나고, 그것들이 다시 ‘나’를 콕콕 찌른다.
소설에서 편지는 스스로조차도 정리할 수 없이 뒤죽박죽으로 삶을 괴롭히는 것들을 토해내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나조차도 알 수 없었던 나의 마음이 갈피가 잡혀가는 공간. 이것이 나를 괴롭게 했고, 저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는 그 모든 사실 섞인 변명을 부끄럼 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마법처럼 그 편지가 ‘어른’이 된 태희가 어린 태희에게 한 통을, 그리고 어린 태희가 어른이 된 태희에게 한 통을 “버리듯” 보내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막막”하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나를 받아들일 한 명은 오롯이 나뿐인 셈이라는 걸 편지라는 소설 속 장치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어른이 될 나이의 태희는 미뤄왔던 일을 한다. 회사를 그만뒀다. 궤변을 늘여놓는 애인에게도 제대로 화를 냈다. 그 무엇도 단숨에 마음이 홀가분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저 했을 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며 어른 태희는 자신의 짐 속 그 편지를 발견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 야광볼이 야광임을 쳐다보기 위해 애를 썼던 어린아이가 보낸 편지를. 지금의 저만큼 짙은 어둠 속에 있었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이 소설은 조금 판타지스러운 편지의 존재와는 별개로 극적인 전개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너무 우리의 삶과 닮아있어 지긋지긋해진다는 표현이 조금은 과격하지만 옳을 수 있겠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거의 태희와 오늘의 태희를 ‘구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저 그날의 태희와 오늘의 태희가 남아있을 뿐. 가족이라는 세계의 붕괴와 나를 둘러싼 세계의 붕괴 아래 묵묵히 서 있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그저, ‘나’일 뿐.
그러니 그 ‘나’라는 두 사람이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할 수 없는 동일 인물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린 태희는 비슷한 흉터를 가진 친구를 만난다. 어른이 된 태희는 지옥이라고 느껴질 만큼 미뤄왔지만 해야 했던, 하고 싶었던 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이 오직 ‘나’와 나의 생각뿐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절망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늘 그걸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구한다거나, 미래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세계를 구하기 위한 도움을 준다는 거대한 구원 서사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절망할 수 있는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의 만남이다. 가장 어두운 시절이 시공간의 문법을 무시하고 잠깐이나마 마주한다. 내가 나였음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말하면서 예감했다. 언제가 되었든 나는 이것을 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엄마나 할머니의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진짜 유산은 바로 그런 기회일지도 모른다. (…)
(222쪽)
조금은 환상적인 이 두 시간의 만남이 결국 미래의 나이자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나, 태희를 버티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미래의 태희는 어렸을 적의 편지를 다시 펼쳐보면서,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할 용기를 얻으면서 언젠가 그것을 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바로 잡힌다. 그리고 그것을 감히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것, 그리고 불행 속에 사로잡혀 내가 되는 꿈을 꾸지 못했던 어릴 적의 내가 가졌던 비관의 일부를 버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성장이 아닐까.
할 수 있다면 울고 있는 어린 얼굴을 도닥이는 힘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는 헛된 꿈을 꾼다. 태희가 그랬듯, 태희의 엄마와 아빠가 그랬고, 할머니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