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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퍼스>의
내용 및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동물의 형상으로 엉성하게 위장한 로봇이 생태계 관찰을 위해 동물의 서식지에 잠입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동물의 알이나 새끼, 혹은 성체의 모습을 본떠 만든 로봇은 주로 가만히 자리를 지키거나 바퀴를 통한 간단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런 어설픈 행동 때문에 관찰에 실패하는 때도 종종 있다. 그런데 그 점을 보완해 더 정교해질수록, 동물들은 로봇을 자신들의 개체라고 여기며 먹이를 챙겨주거나 보호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훗날 이러한 로봇들이 실제 동물들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다면, 그리고 인간이 그 로봇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디즈니·픽사의 신작 <호퍼스>는 이와 같은 상상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호퍼스>는 깜찍한 분위기의 포스터와는 달리 기존 디즈니·픽사 영화에서 보기 드문 문법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조금 잔혹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블랙 유머들을 적절히 섞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본 오피니언에서는 이러한 <호퍼스>만의 무해하면서도 유해한 유머 포인트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아바타 아니고, '호퍼스'!
주인공 메이블은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느덧 19살이 된 메이블은 할머니와 자주 가던 연못에서 동물들이 모두 떠났다는 사실과 제리 시장이 그곳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사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연못에 동물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습지를 조성하는 비버 한 마리가 필요하다. 메이블은 연못 근처에 숨어 있다가 어디선가 나타난 비버 하나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비버는 메이블이 다니는 대학의 교수인 샘 교수가 개발한 비버 로봇이었다. 인간의 정신을 로봇에 옮겨, 동물들의 생태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것이다. 그 로봇이 연못을 되찾기에 적격이라고 생각한 메이블은 막무가내로 비버 로봇에 접속해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1. 동물 애니메이션의 암묵적인 규칙을 깬 '연못 법'과 '죽음'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 먹이사슬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금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였다면 천적이었을 동물들도 다 같이 어울려 평화롭게 사는 설정으로 현실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설령 언급된다고 해도 더 약한 개체를 향한 강한 개체의 폭력이 하나의 '사건'으로 그려지는 등 그것이 고쳐져야 하는 문제인 것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같은 계열사인 디즈니의 <주토피아>만 보아도 그렇다. 동물들, 특히 육식동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본능'이 억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호퍼스>에서는 다르다. 비버를 찾기 위해 물가로 간 메이블은 한 비버가 곰에게 잡아먹힐 뻔한 것을 구해준다. 그런데 그들은 되려 메이블이 '연못 법'을 어겼다며 연못의 왕, 비버 '조지'에게로 데려간다. 조지가 알려준 연못 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다정하게 대하라
두 번째: 먹어야 할 땐 먹는다
세 번째: 우린 함께 산다
두 번째 규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실제로 조지와 인사를 하던 한 물고기가 곰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물고기의 죽음은 엄중하거나 슬프게 그려지지 않고, 그저 금방 지나가는 장면에 불과하다.
영화 속 동물 캐릭터의 죽음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메이블과 조지 왕은 기존에 살던 연못을 되찾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게 되고 그로 인해 포유류의 왕 조지를 포함해 물고기, 조류, 곤충, 파충류의 왕들이 모두 모인다. 제리 시장을 가볍게 협박하려던 메이블, 조지 왕과 달리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다른 왕들 사이에서 메이블은 실수로 곤충의 왕을 뭉개버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 왕들과 메이블 무리는 크게 대립하고 곤충 왕의 아들, 애벌레 타이터스가 새로운 왕으로 각성하게 된다. 그러나 곤충 왕의 죽음 역시 서사 구조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뿐, '깊이 애도할 만한' 죽음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처 동심 파괴를 유발하는 '죽음'의 장면들은 '애니메이션에서 이래도 돼?'라는 생각을 유발하는 동시에 <호퍼스> 영화 전반에 기묘한 웃음 포인트를 더해준다.
2. 동물 → 인간, 뒤바뀐 폭력의 주체
조지를 제외한 의회의 다른 동물 왕들은 연못 생태계를 망친 주범인 제리 시장을 없애기 위해 바다의 포식자, 상어 '다이앤'을 불러온다. 새들의 도움을 받아 육지로 나온 다이앤이 제리 시장의 차를 추격하며 입을 벌렸다가 닫는 장면은, 다른 영화면 몰라도 <호퍼스>라면 끝장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동물들은 인간을 향한 대량 학살을 계획하기도 한다. 동물들이 예전부터 모여살던 연못을 떠났던 이유는 제리 시장의 주도하에 세워진 '가짜 나무' 때문이었다. 가짜 나무에 달린 스피커에서 동물들이 소음으로 여기는 초음파가 나왔기에 이를 견디지 못한 동물들이 연못을 떠났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새로운 곤충 왕이 된 타이터스는 많은 인간들이 연못에 모이게 되는 행사 당일, 스피커의 음파를 조정해 인간들을 뭉개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자연에 대한 개발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매일의 식사를 이유로 우리는 동물들을 향한 '습관적인' 폭력에 익숙해져 있다. 영화 속 동물들 역시 인간들의 잔혹함을 언급하며 '왜 우리는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되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나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AI의 반란처럼, 만약 동물들이 단체로 인간들을 공격해 온다면 이들의 말대로 인간들로서는 할 말이 없지 않을까?
3. 불쾌한 골짜기: 인간을 흉내 내는 동물, 인간의 눈으로 본 동물
샘 교수 일당을 협박해 '제리 시장'의 외형을 본뜬 슈트를 개발하게끔 시킨 타이터스는 메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호핑'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움직임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네 발로 걸어 다니거나 팔다리를 삐걱거리는 등 기묘한 움직임을 보인다. 후반부에는 인간 로봇의 마스크가 벗겨질락 말락 하며 호러틱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처럼 어색하게 인간을 흉내 낸 모습은 '불쾌한 골짜기'를 유도하는 전형적인 연출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연출에서도 불쾌한 골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인간 시점에서 바라본 동물들의 모습이다.
동물끼리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각 동물의 표정이 모두 생동감이 있고, 이빨 크기가 다르거나 하는 등 각자의 개성이 살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시점에서 봤을 때는 모두 초점 없는 '텅 빈 눈'으로 등장하며, 그들의 외관 역시 비슷하게 보인다.
더군다나 말도 통하지 않아서, 메이블 일당이 제리 시장의 차에 침입해 소통을 시도하는 장면은 실제였다면 꽤나 섬찟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우리 삶의 영역으로 침투해 올 때 느끼는 공포감이랄까.
공존이라는 해피엔딩... 현실은?
연못 보존과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입장에서 대립했던 메이블과 제리 시장. 그들은 고속도로를 우회해서 짓는다는 협의점에 도달한다. 메이블은 예전처럼 연못에 찾아가고, 조지와는 더 이상 동물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이처럼 이상적인 결말이기에 더욱 씁쓸함이 느껴졌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고 인간 이외의 생물들과 공존하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정답이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것이 당장 인간에게 이득이 되고 손해가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공존은 결국 인간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 조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영화에서처럼 동물들이 인간을 공격해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는 결국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자연재해, 아니 인간이 초래한 재해들은 상어 '다이앤', 그리고 소음을 내지르는 '가짜 나무'보다 더 큰 결과를 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