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언젠간 죽는다. 대부분의 생명은 병·노환·사고 등으로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보다 더 빠르게 끝을 맺는다. 반대로 생의 유효기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인 자살(自殺)이 그렇다.
삶에서 추방돼 죽음과 직면한 이들은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다. 그러한 아픔은 육체적 생명력은 물론, 정신적 희망까지 송두리째 빼앗는다. 텅 빈 마음과 육체는 죽음이란 늪에 힘없이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늪에 잡아먹힐 이들을 구출할 구명장비는 무엇일까.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위로받게 되는 환상, 나만 이토록 괴로운 게 아니란 연대감, 생에 한 번은 반드시 찾아오는 개연성 없는 자비와 구원이다.
연극 <키리에>는 죽은 후 ‘집’ 그 자체가 된 고독한 영혼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작품이다. 독일의 어느 검은 숲,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이들이 찾는 곳. 숲의 문턱에는 30대에 과로사한 한국인 천재 건축가가 지은 집이 있다. 육체는 소멸했지만, 영혼은 남은 건축가는 자신이 지은 집에 깃든다. 집에 갇힌 그는 서서히 낡아가며 수십 년의 세월을 홀로 견딘다.
한때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던 한국인 엠마가 남편과 함께 집을 찾는다. 무대의 에우리디케였던 엠마는 하데스였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렸다. 몸이 굳는 병에 걸린 남편은 춤을 못 추게 되고, 집에 영원히 갇힌다. 엠마를 사랑했던 남편은 아내의 재능과 건강한 신체, 미래까지 질투하며 몸과 마음을 썩힌다. 저승의 신 하데스의 아내가 된 에우리디케는 그가 있는 지하 세계로 끌려간다. 스스로 계단을 구르며 반짝였던 자신을 망가트린 엠마는 남편을 증오하며 헌신했다. 엠마는 죽기 위해, 남편을 죽이기 위해 ‘집’을 찾았다.
몸과 정신이 모두 건강했던 시절, 집은 엠마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집이란 구조물과 지친 육신이란 껍데기로 늙어서 마주하게 된 집과 엠마는 묘하게 닮았다. 물론 엠마는 집의 영혼과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엠마를 가여워하는 집이 눈물을 흘릴 때, 엠마는 오래된 집에서 누수가 일어나는 거라고 믿을 뿐이다.
죽으러 가는 길, 마지막 밤을 보낼 이들을 위해 엠마는 집을 여관으로 만든다. 엠마는 환각이 보이는 버섯 성분이 든 초콜릿을 만들어 방문객에게 건넨다. 반려견의 죽음 후 고통에 빠진 소설가 관수, 사랑만 준다면 성별 상관없이 만나며 스스로를 학대한 교직원 목련, 희생하기만을 강요받으며 학대 당해온 성직자 분재. 죽기 위해 검은 숲을 찾았지만, 땅에 뿌리 내린 식물과 연관된 이름을 가진 이들은 이름처럼 삶에 다시 뿌리내린다. 그들은 엠마가 준 초콜릿을 먹고 달콤한 환각을 보거나, 자신을 타인처럼 관망하며 위안받는다.
방문객들의 죽음은 미뤘지만 정작 자신은 구하지 못한 엠마는 남편을 죽인다. 그 후 자신도 살해하려던 엠마는 집의 붕괴, 희생, 사랑으로 살아남는다. 집은 엠마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엠마는 집의 순교(殉敎)로 보호받았다.
엠마가 방문객들에게 준 초콜릿을 통해 보이는 환상이, 엠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집의 결단이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엠마, 관수, 목련, 분재는 또다시 언젠간 죽음의 늪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死)를 유예했고 생(生)을 택했다. 딱 하루치의 구원이 될지라도, 그 의미만큼은 가늠할 수 없이 깊을 것이다.
장영 작가가 희곡을 쓰고 전인철이 연출한 연극 <키리에>는 텍스트와 배우들의 연기가 빛나는 극이다. 객석 통로에서 등장한 집의 독백으로 시작한 작품은, 다른 인물들에게도 모두 긴 독백을 줬다. 집·엠마·관수·목련·분재까지 다섯 개의 일인극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개인의 서사를 길게 풀어냈지만, 다섯 명의 삶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전개되며 유기적으로 얽힌다.
연극 <키리에> 무대는 천장이 막혀 있고, 출입구 또한 막혀 있기에 배우들은 객석 통로를 걸어 무대로 향한다. 조명들 또한 바닥에 놓여있다. 이처럼 특수한 무대는 극 중 죽음의 공간을 상징하는 검은 숲과 함께 관 또한 연상시킨다. 검은 무대엔 의자, 베개, 이불 등 많지 않은 소품들과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 ‘무덤 속의 그리스도’ 그림 액자가 놓여있다. 이와 같은 무대 구성은 전인철 연출의 전작인 연극 <헤다 가블러>(2025)와도 닮았다.
수많은 이들을 구원했고, 부활까지 이뤄낸 예수 그리스도에겐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그는 많은 삶을 구하며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렸다. 연극 <키리에>가 ‘무덤 속의 그리스도’ 그림을 핵심 소품으로 배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집’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은 엠마를 살리기 위해 무너져 내리며 자신을 희생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무덤 속의 그리스도(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한스 홀바인, 1521~1522년 제작.
우리 삶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연극 <키리에>에서 집이 죽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엠마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가장 엉망일 때조차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가 나타난단 게 그렇다. 이처럼 이유 없는 연민과 애정, 자비와 구원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구하며 세상엔 희망이란 씨앗을 뿌린다.
집은 엠마를 애정 담긴 시선으로 지켜봤고,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이해하며 눈물을 콸콸 흘렸다. 하지만 엠마에게 ‘집’의 눈물은 그저 오래된 ‘집’의 누수일 뿐이다. 집이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 또한 오래된 건축물이 붕괴하는 게 아니며, 가여운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신의 순교였다. 연극 <키리에>는 이처럼 우리 주위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우린 그걸 모를 뿐이라 말한다. 집을 세상 혹은 신, 엠마를 인간에 비유한 듯한 작품은 극 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의 마음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정답은 결국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