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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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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립극단] 삼매경(2026) 포스터.jpg

 

 

 

삼매경의 뜻


 

제목을 듣자마자 삼매경이라, 아 어디서 들어봤는데… 곰곰 생각하다가, 어린 시절 게임 광고에서 이 단어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머리 쓰는 게임이기도 했고, 뭔가 어감상으로도 그래서인가 똑똑한 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보니, 네이버 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 (불교) 잡념을 떠나서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


그런데 다음 문장이 있다.


이 경지에서 바른 지혜를 얻고 대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삼매경’의 순서는 대강 이러하다.

 

잡념 -> 하나에 집중 -> 경지 -> 바른 지혜 -> 올바른 파악

 

즉, 삼매경은 잡념에서 시작한다는 소리다.

 

 


삼매경의 서사들


 

나는 이 엉망진창으로 아름다운 연극 <삼매경>을 보면서 여러 엉망진창(p)인 작품들이 떠올랐다.


처음 떠오른 건 성해나 작가의 단편 <혼모노>. 돌연 나타난 신세대 무당한테 밀려 자기가 모시던 ‘장수할멈’한테도, 자기의 단골한테도 버림받은 구세대 무당 화자의 이야기. 막바지에 화자는 신세대 무당 앞에서 경쟁하듯이 굿판을 벌이다 작두에 올라타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제 누가 더 오래 버티나의 싸움이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p.152) (이 문장은 연극 <삼매경>에 대사로 들어가도 적당할 것 같다.)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다니엘 콴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블린(양자경 배우)’이 온갖 평행 우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아주 빠르게 경험하고 스쳐 지나가는 대목들. 또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 제1호의 그 수많은 ‘아해’들…, 그리고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의 에드워드 노튼 배우의 그 자아분열 장면들…


이런 작품들은 보는 사람도, 그 속의 인물도 모두 격렬한 투쟁을 통해 삼매경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인물들이 삼매경에 도달한 상황을 돌아보면 좀 이상하다. 그 주변은 삼매경의 뜻에서 언급된 바른 지혜와 올바른 파악과는 거리가 멀게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다. 피가 흘러내리고(<혼모노>),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변하고(<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무서움이 켜켜이 쌓이고(<오감도 제 1호>), 세상이 붕괴된다(<파이트 클럽>). 삼매경이란 바른 지혜와 올바른 파악의 상태인데도 왜 그렇게 엉망인 걸까. 왜 그 전보다 더 엉망진창처럼 보일까.

 

 


차분하게 미친 연극의 시작


 

연극 삼매경에 그 엉망진창의 답이 있다.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02.jpg

 

 

연극 <삼매경>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모호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 점에서 이미 삼매경의 경지에 이른 상태라 할 수 있다. 삼매경은 앞의 뜻도 있지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라는 뜻도 갖고 있으니까.


물론 극이 시작되어 배우들이 대사를 하는 순간 ‘한 가지’에 집중된 상황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35년이란 세월의 간격을 두고 한 배우가 연기한 어린 ‘도념(조성윤 배우)’과 그의 현재인 초로의 ‘도념(지춘성 배우)’ 둘이 마주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자아분열이다. 뒤에서는 다른 배우들이 갖가지 자연물들로 분해 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보니, 차분한데 정신이 없달까. 아니, 차분하게 미쳐있달까.


그 둘은 차분히 얘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떤 합의에 이르러 무대를 꾸민다. 그리고 그 세월의 간격을 두고도 이 둘을 만나게 한, 35년 전에 상연된 <동승>이라는 극에서 연기했던 동승 도념을 초로의 배우가 다시 연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35년 전의 그때를 실패라고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강산이 세 번 반 정도 변했음에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지독한 미련! 게다가 골백번은 반복했을 지독한 재연(再演)이라니(그러면서 팜플렛에 이 극이 함세덕의 <동승>을 오마주했다고 적혀 있던 게 떠오른다). 허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그런데 어린 도념이 한창 연기하는 초로의 도념에게 다가가 칼을 찌른다. 더 이상 나(과거)를 방해하지 말라는 걸까, 제발 현재를 살라는 걸까. 뭐건 간에, 초로의 배우는 죽는다.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05.jpg

 

 

저승길에서 엄마를 만난 배우는 저 극락문 뒤로는 이승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끝이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에 잠긴다. 저승길인데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는다. 삶이? 아니, 연극이. 결국 삼도천으로 뛰어들어 시간을 거슬러 다시 한번, 정말 마지막으로 그 재연의 현장에 가고 싶다고 사력을 다해 외친다.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06.jpg

 

 

눈을 뜨자, 35년 전의 자신이 되어 있다. 1991년의 연습실. 연기에 욕심이 많은 한창 때의 자신이 거기 있다. 그는 자기 삶과 극 속 도념의 삶이 일치하는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하고는-그 또한 엄마가 죽는다-연기 공들이기에 몰입한다. 장례식장에서 슬픔에 젖어 자기를 위로하는 문상객의 표정을 유심히 보고는 나중의 슬픔 연기를 위해 기억하려고 한다(정말 징하지 않은가). 급기야 저승에서 엄마가 올라왔는데, 놀라 까무러쳐서는, “누구세요?”라고 할 정도로 그는 연기에 몰입한다.


그러다 다시 도념 배역을 연기하게 되면서 배우의 자아는 삼매경의 삼(三)처럼 세 갈래로 갈라진다(지춘성 배우가 실제로 <동승>에서 도념 역을 맡았다고 하니 네 갈래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물일곱의 자신(1991년의), 열네 살의 자신(그 동승의), 예순둘인 자신(죽은 자신). 과거의 자신들에게 휘둘렀던 배우는 자신을 죽인 그 자아를 본인이 져버림으로써 이제부터 이 극을 주도하겠다고 당차게 선언한다. 연기의 욕망이 극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퍼진 것이다.

 

 


작두 타기


 

그 후부터는 말 그대로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이 연극에서 가장 엉망진창이고 가장 재밌는 부분은 <동승> 속 주지(이원희 배우)가 알록달록한 사탕이 열매로 자란 나무 지팡이를 들고 등장하고서 시작되는 후반부다.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11.jpg

 

 

이제 배우는 잔혹한 사람이 되어 있다. 사냥꾼 아비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인지 절 근처에 덫을 놓아 토끼를 잡으려고 살생을 계획하는데, 그 덫에 걸리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또다른 자아다. 맞다. 또다른 자아가 나타난 것이다. 그가 잔혹해질 수 있었던 건 새로운 자아가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WAKE UP! WAKE UP!이라며 등장하기 때문이다.


연기에 대한 배우의 욕망은 극 속 도념의 소망으로 이어진다. 도념은 아들을 잃은 미망인이 사는 집, 즉 속세로 가고자 한다. 자기는 어미가 없고 미망인은 아이가 없고, 둘이 만난다면 지극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미망인은 배우가 여러 겹의 자아를 띠고 있듯이 도념의 어미이자 배우의 어머니이기도 하다(곽성은 배우). 혼재된 세 요소가 이런 기묘한 줄기로 꼬아져 있는 듯하다.

 

 


또 실패. 이제는 포기?


 

하지만 번번이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 자기를 방해하고 죽이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업보가 쌓인 걸까, 그의 살해가 도념이 속세에 가는 걸 반대하던 주지한테 드러나니, 갈등은 극에 치달을 수밖에. 미망인이 원하고, 도념이 원해도 주지의 반대로 도념은 속세로 갈 수 없게 되면서 결국 도념은 실패하고 만다.


도념의 실패는 배우의 실패기도 하다. 정말 마지막으로,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35년 전의 연극으로 돌아갔는데도 또 실패라니.


하지만 뭔가 다르다. 다르게 느껴진다. 전의 실패들과는 좀 다르게. 도념도, 배우도, 관객도 안다.


하도 엉망으로 놀았다 보니, 이제는 알게 된다. 포기할 때가, 놓아줄 때가, 이문세의 <옛사랑>의 가사 한 줄처럼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라고 말할 때가 왔다는 걸. 도념이라는 옛사랑을 거기에 두고 와야 한다는 걸.

 

 


삼매경의 지혜


 

[국립극단] 삼매경(2025) 공연사진20.jpg

 

 

나는 바른 지혜, 올바른 판단이라는 건 언제나 후에 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서투른 사람, 철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곤 한다. 과거의 엉망을 정당화 시켜줄 방황이라는 근사한 근거를 들기도 한다. 그만큼 현재가 낫다는 뜻으로 그런 생각과 말을 주워섬긴다.

 

하지만 현재가 가진 듯 보이는 막대한 권한은 허울만 좋을 뿐이다. 과거는 대부분 완성되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의 해결적 습성에 의해 완수되어 있다. 반면 현재는 위태롭기 그지없는 자리다. 현재는 마치 일정 시간 안에 건너가지 않으면 사라지는 발판처럼 매 순간 과거가 될 조짐을 보인다. 현재는 과거와 달리 ‘만약에’ 같은 조건을 내걸 수 없다. 가능한 방법을 최대한 많이 찾고 선택하고 해쳐나가야 한다. 그만큼 주도권이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져 있고, 그래서 자유롭지만서도 동시에 외롭기도 하다.


그러다 발판이 무너져 아래로 곤두박질치거나, 지금 딛고 있는 발판에서 나아갈 데가 없다 싶어지면 그 철없고 서투르고 방황하던 때를 슬쩍 보게 된다. 물론 우리가 뒤를 돌아보며 가지는 감정은 유구한 역사가 있어 ‘그리움’이라고 불린다. 문제는 그게 케케묵어 ‘미련’이 되는 순간 <삼매경>의 배우가 겪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진다는 것이다. 과거의 미련이 나와 나의 현재를 잡아먹는 일이.


나는 우리는 영원히 서투르고 영원히 철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게 그런 일이니까. 중요한 건 어느 순간 그걸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르는 채로 살아가다가, 아는 채로 살아가게 된다. 나를 달라지게 하는 건 그렇게 무언갈 알게 되며 생기는 그 혜안이다. 그 혜안이 지금의 선택에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엉망이라는 진리


 

그래서 나는 삼매경에서 뜻하는 바른 지혜, 올바른 판단이 바로 ‘바르게 볼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매경에 빠지고서야 이리도 ‘엉망’이었다니,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 잡념에 빠져서 볼 줄 모르는 건 이 엉망이다. 엉망이라는 진리다. 잡념 속에서도 우리는 이게 엉망이라는 걸 모른다. 마치 마구 어질러져 있는 방이 나에게는 질서정연하게 보이는 것처럼.


배우가 이 극의 후반에서 이른 경지, 삼매경은 완전히 아수라장의 경지이다. 수많은 자아가 살해당하고 다른 배역들은 역할이 뒤섞이거나 소품이 뒤섞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초반의 무수한 실패와 막바지의 이 실패가 다른 점은 좀 더 엉망다워졌다는 것이며, 그걸 안다는 사실이다. 그가 알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이 연극을 주도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배우는 이윽고 무대에서 깨끗이 물러나며 이렇게 외친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사람들은 선택과 포기가 다르다고 보지만 나는 포기가 선택 안에 들어있는 가장 용기 있는 결정이라 생각한다. 포기라는 건 볼 장 다 봐야 선택 가능한, 숭고한 결정이 아닐까. 항성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으며 초신성 폭발하는 것처럼, 별이 아름다운 게 사위어가기 때문인 것처럼, 포기는 가장 많은 사연이 달린 아름다운 선택이지 않을까.


포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별이다. 공허함뿐인 것만 같은 이별은 그래도 두 가지는 알려준다. 존재가 아름답다는 사실과,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게 끝나고 무대에 남은 배우의 겉옷, 그리고 천장에서 무대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모래알갱이들이 관객에게 이별의 여운을 길게, 길게 안겨준다.

 

 

 

에디터 안태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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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나는 거기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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