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정보를 담아 건네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추상적이지만 짙게 남는 '잔상'이 있다. 오늘날은 정보의 시대다. 우리가 딛고 있는 세상은 이제 정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 사이에서, 예술이란 무얼까. 윗 문장을 인용해 답하자면 예술은 후자다. 차곡차곡 쌓여 부풀어 오르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예술이 우리의 삶에서 맡은 역할이다.
예술은 손에 잡을 수 없고, 명확히 정의할 수도 없는 존재지만, 마치 '슬펐어.'나 '괴로웠어.'와 같은 표현들을 느끼게 한다. 때로는 그 '말'로 전달하는 방식보다 더 깊게 가슴을 찌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예술은 공감의 영역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을 관람하고 들었던 생각이다. 예술은 가끔 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보의 전달과는 다른, 감정과 공감에서의 영역에서다. 이 공연은 그 역할을 해낸 작품이었다. 그의 생애와는 텍스트로 설명될 수 있을지라도, 그의 삶에 닿는 경험은 예술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안중근의사 순국 116주기를 계기로,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삶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발레라는 순수예술 장르를 통해 나라사랑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기획된 공연이다.
"대한독립의 함성이 천국까지 들려오면 나는 기꺼이 춤을 추면서 만세를 부를 것이오"라는 안중근의사의 유언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안중근의사 역시 기쁨의 순간에 춤을 추었을 것'이라는 사유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사실 마지막으로 발레 공연을 관람했던 때가 십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전이었던 것 같다. 발레라는 장르에는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스스로 공연을 찾아 보러 간 적은 없었다. 그런 내 앞에 전해졌던 초대가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이었다.
궁금했다. 안중근의 삶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의 일생을 보여줄까? 발레에 대하여 무지했지만, 무용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이 공연은 나에게 온 몸을 다하여 한 사람의 일생을 보여준다는 포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와닿을 때가 있다. 발레를 그 행동의 영역에 넣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번 공연은 그 취지에 정확히 부합했다. 정확히는, 안중근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연대기와 그 안의 희노애락을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안중근의 삶을 책으로 접했을 때 들었던 가장 큰 감정은 '존경심'이었다. 그러나 책으로는 담담하게 써내려질 뿐이었어서, 그가 어떤 기분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투신했는지는 온전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야 나는 내가 그의 용감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독립을 외칠 수 있는 용기따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나약한 사람이니까.
적어도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삶에 조금이라도 닿아볼 수 있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70분간 무용으로만 이루어진다. 나레이션을 제외하면 거의 대사가 없고, 오로지 몸짓으로 모든 것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닿을 수 있었다. 그 역시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희생 뒤에는 그가 두고 온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했던 용기와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이어진 몸짓뿐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우라! 우라! 우라!'하고 소리치는 장면 역시 인상깊었지만, 내 가슴 속 깊이 남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마지막, 교수형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가기 전 수의를 입고 춤을 추는 안중근의 모습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독립운동가들도 후회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가족과 아내와 함께 조용히 살았다면, 독립을 외치지 않았다면, 조금은 오래, 그리고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까ㅡ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조마리아 여사의 대사와 수의를 입고 춤을 추는 안중근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 후회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삶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비통하게, 어쩌면 애틋하게, 혹은 후련하게 흩날리는 몸짓은 금방이라도 떠나갈 것만 같았다. 새하얀 천국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새하얀 수의. 두 개의 하얀 것이 하나로 겹쳐질 때까지, 난 그가 후회없이 춤을 추고 떠나기를 몰래 바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ㅡ 수의가 어느새 문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쯤이 되어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한독립의 함성이 천국까지 들려오면 나는 기꺼이 춤을 추면서 만세를 부를 것이오"
공연이 끝난 뒤 나는 그의 삶에 닿아있을 수 있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이들이 전하는 끊임없는 함성 소리는 안중근에게 닿았을까. 조금은 닿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