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브라이드!>는 이러한 일반론을 뒤집으며 괴물의 자리에 ‘생각하는 여자’를 호명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며 사유를 존재의 확고한 증거로 확립했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은 오랫동안 이 존재 증명에서 소외된 채 ‘괴물’이라는 이름 아래 놓여왔다. 우리는 언제나 사유하고 있었음에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치부되었으며, 존재하는 모든 순간 타자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모든 괴물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항상 이곳에 있었다. 당신의 신부가 되어 자식을 낳고, 한 집안에서 먹고 마시며 당신의 곁에서 살아왔다. 같은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고 있었다. <브라이드!>는 이처럼 ‘생각하는 여자’를 진짜 ‘괴물’로 재탄생시키며,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존재의 실체를 가시화하려는 도발적인 시도를 감행한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탄생 이래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리메이크의 원천이다. 영화 <브라이드!>의 메기 질렌할 감독은 캐스팅과 주제 선정에서 매우 영리한 전략을 구사한다. 과거 '배트맨의 연인' 역을 맡았던 자신의 화제성을 메타적으로 활용하며, 정작 '배트맨'이었던 크리스찬 베일을 괴물 역으로 배치한 뒤,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제목 그 자체인 ‘신부' 역의 제시 버클리에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극 중 제시 버클리는 메리 셸리의 영혼부터 1930년대 시카고의 첩보원 아이다, 그리고 프랭키의 신부 페넬로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의 페르소나를 수행한다. 영화는 하나의 얼굴에 응축된 이 다층적인 여성 서사들을 거침없이 표출해 낸다. 제목 끝에 붙은 느낌표처럼, 영화는 산발적이고 폭발적인 플롯을 통해 난해함을 선사한다. 파편화된 시(詩)처럼 전개되는 이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며느리의 스냅사진들(Snapshots of a Daughter-in-Law)> 속 이미지가 자연스레 중첩된다.
2.
싱크대에서 커피포트를 쿵쾅쿵쾅 씻을 때
그녀는 천사들이 꾸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낙엽이 쌓인 정원 너머로 비가 내릴 듯한 하늘을 내다본다.
참지마, 그들이 이렇게 말한 지 이제 한 주가 지났을 뿐이다.
그 다음 주엔, 만족하지 마
그다음엔, 스스로를 돌봐, 네가 다른 사람들을 구해줄 순 없어라고 말했다
때때로 그녀는 온수에 팔을 데기도 하고,
성냥불에 엄지손톱을 그슬리기도 하고,
양털처럼 구불구불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주전자 주둥이 위에 손을 대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아마도 천사들이겠지,
매일 아침 눈에 모래알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더 이상, 그녀를 해치는 것은 없으니까.
3.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잔다.
그녀는 자신을 물고 있는 부리가 된다. 그리고
용수철 뚜껑 같은 자연은, 시간과 도덕을 담고
곰팡이 핀 오렌지 빛 꽃 여성용 약품들, 납작 누른 여우 머리와 난초 꽃 장식 밑으로
흉측하게 튀어나온 보디세아의 젖가슴.
잘생긴 여자 두 명이, 도도하고, 날카롭고, 미묘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나는 정교한 문양의 크리스털 그릇과 마욜리카 도자기 너머로
궁지에 몰린 분노의 여신들이 먹잇감을 놓고 고함치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들의 편견으로 가득 찬 언쟁, 내 등에 꽂힌 녹슨
그 오래된 모든 칼들을, 나는 당신들에게 들이댄다.
나와 닮은 자여, 나의 자매여
- 에이드리언 리치, [며느리의 스냅 사진들] 중.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메리 셸리의 영혼이 내뱉는 날카로운 외침으로 막을 연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벨 자(The Bell Jar)>를 연상시키듯 유리병 안에 갇힌 메리는, 여성들에게 더는 인내하지 말고, 모든 진실을 폭로하라 울부짖는다. 여성의 신체를 조개에 비유하는 저열한 성희롱이 난무하는 술자리, 그곳에서 웃음으로 치욕을 견디던 아이다는 메리의 영혼에 빙의되어 기괴한 몸부림을 시작한다. 그녀는 진실을 발설하려다 혀가 뽑힌 채 사라져 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토해내고, 결국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한다. 카메라는 메리의 영혼과 아이다의 형상을 뒤섞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두 존재의 경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아이다의 죽음과 메리 셸리라는 영혼의 부활을 서늘하게 병치한다.

‘잠을 자는 행위’는 생존을 증명하는 가장 일상적인 징표다. 죽은 자는 영면에 들지만,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체를 이어 붙여 생명을 얻은 ‘프랭키’ 역시 잠을 자는 살아있는 존재다. 그는 생명이기에 함께 잠들 상대를 갈망하며 지독한 고독을 느낀다. 괴기스러운 외형 탓에 사회에서 도태된 채, 영화 속 사랑 이야기에 자신을 투영하며 버텨온 그는 결국 유프로니우스 박사를 찾아가 자신의 ‘신부’를 만들어달라 간청한다. 우스운 것은 그가 눈앞의 여성이 박사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코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괴물이라는 신분 탓에 ‘인간의 범주’에서는 소외되었을지언정,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 사회의 성차별적 질서만큼은 충실히 학습했다는 점은 해학적이다. 남성 괴물 프랭키는 박사의 기술을 빌려 아이다의 시체를 도구화하고, 오직 ‘브라이드’라 불릴 존재를 소생시킨다. 자신의 반려를 욕망하며 또 다른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그의 결정은, 과거 자신을 만들었던 프랑켄슈타인의 오만함만큼이나 폭력적이다.

그렇게 소생된 ‘신부’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요구에 “I PREFER NOT TO”라며 불응한다. 항상 살아있었고 함께 자고 깨어났으나, 그간 뇌 없는 언데드처럼 여겨졌던 여성들의 처우를 대변하듯 망가진 신체와 조각난 기억을 가진 이 크리처의 탄생은 그 자체로 모순이자 담론이 된다. 프랭키를 위한 목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살해된 시체의 몸을 빌려 소생했지만, 특정 모체 없이 태어났기에 그녀는 출처 모를 기억들이 기워진 누더기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 속 벨라와 달리, 그녀는 여성형으로 박제된 유아기적 괴물이라기보다 기억의 폭발이 남긴 잔해에 가깝다. 그녀는 고급 어휘를 맥락 없이 남발하고, 클럽에서 몸이 기억하는 본능에 기대어 춤을 춘다. <브라이드!>는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최초의 인간이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뒤집지 않은 채 출발한다.
깨어난 신부는 자신의 짝인 괴물에게 ‘프랭키’라는 찌질하고 귀여운 애칭을 붙여주며 어울린다. 클럽 댄스플로어를 누비던 신부는 남성들의 성추행을 참지 않고 음악 소리가 높은 중심부에서 고발을 외친다. 미친년 취급을 당하며 쫓겨난 둘은 자신들을 강간하려던 남자 둘을 죽이게 되고, 결국 경찰의 표적이 되어 도주하게 된다.
길 위에서 ‘브라이드’는 자신의 이름과 과거를 찾으려 한다. 위기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을 위한 목소리를 낼 때마다, 억압받던 과거와 이름들이 소용돌이처럼 돌아온다. 괴물이라 천하무적일 것 같은 신부가 마주하는 고난은 역설적으로 오직 ‘여성’이라서 겪는 문제들이다. 세상은 괴물이라는 이유로 프랭키는 두려워하며 피하지만, 브라이드는 함부로 추행하고 그녀의 의사를 거스른다. 괴물조차 성별이 선행하는 모순 속에서 신부의 ‘I prefer not to’라는 선언은 허공에 흩어진다. 결국 그녀가 총을 쏘며 폭발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녀를 괴물이라 부르며 도망치는 ‘성의’를 보인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댄스플로어 신에서 감독은 메시지를 명확히 한다. 무도회장을 포위한 경찰들과 고위층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브라이드는 그들이 은폐해 온 여성들의 이름과 죽음을 나열하며 죽은 넋들을 소환한다. 살아있을 때 죽은 취급을 당했고, 죽어서도 존재로서 다시 한번 죽임을 당한 여성들의 이름을 생사의 경계 상태에 놓인 브라이드의 목소리로 소생시키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메리의 영혼에 빙의되어 폭로를 멈출 수 없었던 아이다처럼, 댄스홀의 여성들은 함께 그로테스크한 춤을 춘다. 결국 미국 곳곳에서 아이다의 검은 입과 폭발적인 머리는 아이콘이 되어 여성 운동과 폭동으로 이어지며 세상을 그들의 댄스플로어로 뒤바꾼다. 이로써 아이다의 죽음을 뿌리로 삼은 브라이드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가는 순간이다.

신부는 자신이 프랭키의 신부가 된 기원을 찾아가려 한다. 프랭키는 그때마다 ‘페니’라는 가짜 애칭과 꾸며낸 청혼 이야기로 방해하지만 결국 거짓은 들통난다. 신부는 아이다로서의 과거와 프랭키의 소유물로서의 자아가 모두 타자에 의해 조각난 상태임을 직면한다. 결국 그녀는 파편화되고 미쳐버린 상태 자체를 자기 자신으로 수용하며, 스스로 ‘브라이드’라 명명한다. 이는 고유명사를 획득한 괴물의 ‘재-재탄생’ 선언이다.

엔딩은 오프닝을 뒤집으며 연구실로 회귀한다. 뇌를 잃은 프랭키와 온전한 정체화를 마친 브라이드, 수사관이 되어 그들을 쫓아온 미르나와 프랭키를 살려야 하는 박사가 한자리에 모인다. 괴물을 두려워하던 간호사조차 브라이드의 상징인 ‘검은 혀’를 가진 채 그들을 맞이한다. 쏟아지는 총알을 미르나가 제지하고, 박사는 사랑하는 자들을 함께 있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들을 되살린다. 메리 셸리의 영혼은 이 광경을 보며 흡족하게 웃는다. 생각하는 여자의 혀를 잘랐던 마피아 보스가 역으로 혀를 잘리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는 끝까지 메시지를 외친다. 괴물은 생각하는 여자와 잠을 자며 살아간다. 여자는 괴물과 잠을 자왔고, 더 이상 숨지 않으며, 괴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전면에 던진다.
이 영화는 여성 서사 텍스트를 활용하려는 엄청난 욕심을 보이고, 그 지점이 완성도와 별개로 이 작품을 분석하게 만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의 서사로 끌고 가기엔 모든 걸 파편적으로 담아내 전달력이 떨어지고, 흥미로운 소재들을 매끄럽게 조립하지 못한 한계도 분명하다. <브라이드!>는 반려이자 동료로서 억압당한 여성들을 대변하며, 그들의 창작 야망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담으려 했다. 영화 안에서 사용된 고전 영화들의 오마주는 주류 역사를 괴물의 역사로 재서술하려는 시도였으나 오히려 플롯을 난잡하게 만들고 남성들의 연대까지 서브플롯으로 무리하게 담아내려다 서술이 엉킨다.

프랭키는 그녀를 반려로 이용하려던 목적을 버리고, 스스로 그녀의 반려가 되기를 자처하며 연대자(앨라이)로서의 사랑을 맹세한다. 수사관 제이크의 결정도 연대를 보인다. 과거 그는 정보원 아이다와 잠자리를 가질 만큼 가까웠으나 그녀들의 죽음은 방관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돌아온 아이다와 마주하며 본인이 여성을 타자 취급했던 사회의 괴물들과 다를 바 없었음을 성찰하고, 동료 미르나를 차기 수사관으로 임명한다. 신부의 부활을 통해 또 다른 여성이 ‘수사관’이라는 정당한 직책으로 그들을 쫓게 된 것이다. 다만 이런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기엔 이야기가 산발적이라 설득력이 매끄럽게 붙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서론에서 던진 질문에 다시 답해야 한다. 당신의 침대 곁에서 함께 잠을 자던 그 여자는 괴물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평생을 적과 동침해 온 셈이다. 혹은, 그 여자를 괴물이라 부르며 곁에 두었던 당신이 진짜 괴물인가. 이름 없던 미지의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자각한 지금, 괴물은 더 이상 희귀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하여 이런 담론을 정면으로 던지는 영화의 등장은 달갑다. 당신과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이들의 존재를 온전히 자각하고 타자화를 멈출 때, 비로소 괴물이라는 말 뒤의 담론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담론을 정면으로 던지는 영화의 등장은 달갑다. 앞으로도 침대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더 늘어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