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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핏줄로 탄생한 괴물, '파묘' [영화]

핏줄이 괴물이 될 때,

by 김홍일 에디터
2025.09.15 18:18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를 두려워한다. 이성이 세계를 모두 밝힌 것처럼 보여도, 공포는 여전히 무지의 내부에서 도사린다. <파묘>의 공포는 무지의 내부, 집단 기억에서 점점 잊혀 가는 이미지를 꺼내 든다. 극 중 ‘험한 것’으로 지칭되는 괴물들은 ‘파묘’라는 전통적 행위를 시작으로, 관객들에게 불안감을 유발한다. 요컨대 장재현 감독은 이제까지 한국인의 핏줄 속 숨어져 있던 불온한 감정을 뽑아서, 하나의 호러적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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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호러적 이미지를 프레임에 담아내기 위해, 감독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바로 괴물성의 기원이다. 기괴한 이미지와 우리가 해석하지 못하는 존재를 바라볼 때, 우리는 괴물성을 느낀다. 이는 ‘심연’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니체의 말처럼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괴물성은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며, 이는 외부의 공포가 아닌 내면의 불안을 증명한다. 외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과거에서부터, 이성과 기술이 모든 무지를 밝혀가는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괴물성을 마음에 품고 있다. 그렇다면 <파묘>의 괴물성, 즉 <파묘>의 호러적 이미지는 어디에서부터 탄생하는 것인가?

 

 

 

1. 핏줄의 굴레


 

핏줄이야말로 <파묘>의 초반부를 지배하는 공포이자, 가장 큰 모순이다. 무당인 화림(김고은 분)과 봉길(이도현 분)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의 의뢰를 받는다. 이들은 집안에 대물림되는 병의 원인을 묫자리의 문제라고 파악한 후, 한국의 유명한 지관인 상덕(최민식 분)과 장의사 영근(유해진 분)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조상의 ‘묫바람’을 막기 위한 분투, 마침내 화장된 시체는 결코 외부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후손에 대한 증오와 분노, 나아가 대대로 쌓아진 악의이다.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왜 분노한 조상은 핏줄을 괴롭히는가? 왜 자신의 대를 끊으려고 하는가? 이는 이미 상덕의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죽어서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육체와 정신의 공혈(共血) 집단.’

 

그것이 조상이 바라는 공멸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박씨 가문을 괴롭히는 대물림도 이와 맞닿아 있다. 40년 동안 지관을 했던 상덕조차 보지 못했던 악지 중의 악지. 가족이 지은 죄를 부끄러워 하면서, 조상의 관을 그대로 화장하라는 큰어른의 말은 공포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다. 다르게 말하면, 이들의 행위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신앙과 예법에 반기를 든다. 그 틈에서 공멸의 악의는 더욱 선명하게 인식된다.

 

무당과 지관이 함께 펼치는 속임굿도 이와 같은 역할이다. 묫바람이 난 조상의 원한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무당과 지관은 두 가지의 무속 행위를 한 번에 진행한다. 파묘와 굿이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은 묘지에 있어서는 안 될 여우, 그리고 여인의 얼굴을 한 뱀으로 이어지며 관객의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묘지에 있어서는 안 될 여우라는 상징성은 공간을 지배하며, 묘지에서 나온 여인의 얼굴을 한 뱀이 이를 마무리한다. 무엇인가 있다. 그리고 그 악의는 전혀 핏줄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강조점으로 활용된다.

 

이따금 핏줄의 굴레는 후손의 영광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파묘>에서는 대를 끊는 업보의 원인이다. 파묘된 묘에서 나온 ‘험한 것’은 자신의 핏줄에게 스며 들어가, 한국인의 집단 기억을 건드린다. 이때, ‘험한 것’과 그 피를 잇는 사람의 업보가 밝혀진다. 반민족 행위, 조상은 후손에게 빙의하여, 일제 강점기의 군인처럼 경례한다. 나아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해서 강제 동원을 참여하라는 말을 외치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가족’이라는 파생된 기억에서 민족이라는 핏줄을 떠올린다. 마침내 혼령이 아기에게까지 악의를 펼치는 순간, 핏줄을 공유하던 어른이 결정을 내린다. 일제로부터 받은 훈장과 낡은 관이 불에 무너져 내리고, 모순으로부터 탄생한 공포는 막을 내리는 듯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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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겉도는 괴물


 

만약 <파묘>를 반으로 쪼갤 수 있다면, ‘동티’가 난 일꾼의 이미지가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악의 화신을 묻어 놓은 첩장을 발견하면서, 지관과 무당은 악의 화신을 마주한다. 불온한 악의 화신인 ‘다이묘’이다. 등장하자마자, 다이묘는 인물들을 무참히 짓밟는다. 가위라는 요소로 불완전한 현현을 보여주거나, 경계를 무참히 부수는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불안감을 유도한다. 마침내 다이묘의 이미지가 완전해지고, 일본식 도깨비의 형태를 프레임에 그대로 담아낸다.

 

하지만 영화가 갑자기 느슨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의 이미지도 영향이 있겠지만, 영화를 지배하던 핏줄이 갑작스레 확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이묘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클로즈업과 날아가는 도깨비불은 충분히 관객을 압도한다. 하지만 다이묘의 존재는 <파묘>에서 논하기 시작한 핏줄의 문제가 거대 맥락으로 대체되었음을 상징한다.

 

특히 후반부의 상덕의 설명 부분은 이러한 거대 맥락을 위해 존재한다. 민족의 정기를 막기 위한 쇠말뚝을 뽑아내자는 말과 함께, 장의사 영근은 그저 음모론이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상덕은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차단하자는 말에 결국엔 다이묘와 싸우기로 결심한다. 다이묘와 싸우게 되는 결전 속에서 화림이 모시는 한국의 무속신과 악의 화신은 끝나지 않는 영력의 싸움을 벌인다. 나아가 마침내 영덕이 다이묘의 옆구리에 말뚝을 꽂아 넣을 때, 이제 악의 영향은 한반도에 없어진 듯 보인다.

 

문제는 영화의 후반부 내내를 지배했던 악의 화신이 공포가 아닌, 적이라는 점이다. 기존의 맥락을 완전히 뒤엎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기순애’, ‘여우’, 한반도의 형태를 꾸준히 초반부에 언급했다. 하지만 괴물성이 오로지 외부에만 존재한다. 물론 다이묘의 등장은 강렬하다. 불온한 악의 화신으로, 불완전한 현현과 경계 파괴를 통해 괴물성을 구현한다. 도깨비불, 클로즈업된 공포 연출, 그리고 일본식 도깨비 이미지까지 모두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 괴물성은 내면을 침범하기보다는 외부에 머무른다. 앞서 심연에서 피어난 공포에 비하면, 다이묘는 덜 위협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다이묘라는 악의 화신은 내부를 침범하지 않고 외부만은 겉도는 셈이다.

 

<파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핏줄로부터 탄생한 괴물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초반부를 지배하던 혼령부터, 악의 화신 다이묘까지. 잊어야 하는 시대에 태어나, 잊힐 과거들. 다만 이들을 잊어갈수록 기억은 우리의 심연 속에서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우리가 핏줄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 볼 때, 심연은 외부로 끄집어진다. <파묘>는 핏줄에 새겨진 괴물을 이미지로 끄집어낸 영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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