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침묵해야 한다. 침묵의 원인은 그들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는 동정과 배려가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나>는 이러한 슬픔은 계면조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이는 ‘애도의 방식’에 주목한다. 말할 수 없는 비극을 감독의 미적 감각을 통해서, 비극을 더욱 강조하기 때문이다. 두 여고생의 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도 이러한 애도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도는 감독의 주관적인 영역 내에 머무르면서도, 평론이 규정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요컨대 애도라는 영역의 감각적 유입은 영화 자체가 추구하는 프레임 이미지를 호도할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현철 감독의 수상 소감처럼, 죽음 다음의 세계가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는 평론적 공간 내에 위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너와 나>에서 반복되는 초원의 이미지와 거울의 상징물은 존재의 부재를 내포하는 듯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너와 나>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주관적인 빛, 차단된 어둠
영화의 첫 장면,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이고 카메라는 곧 거울을 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춘다. 거울에 비친 세미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제주도를 같이 가지 못하는 친구 하은이를 설득하는 과정까지, 모든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어둠은 차단되어 있다. 빛이 강조되어, 모든 사물에는 어두움이 거세당한 채다. 조현철 감독의 인터뷰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일상에게 포획된 듯한 초반 시퀀스는 기억의 영역에서 재현되었다고 할 것이다. 기억은 부정확하고, 개인의 해석에 따른 주관적인 영역이다. 만약 죽음에 대한 재현을 기반으로 부활하는 기억은 어둠이 반드시 제거될 터다. 그 배경이 밤이어도, 기억의 순간만큼은 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감독은 프레임 자체를 밝게 만들면서, 어둠을 제거한다. 빛의 영역에서 가져올 수 있는 사물인 거울과 캠코더의 이를 뒷받침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지각의 상징물이었던 거울의 의미를 거세하듯, 거울의 의미를 ‘비 상대’로 탈바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아가 세미와 하은이 걷는 밤거리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까지 생생히 재현하게 만들면서, 이들의 어둠을 모두 걷어낸다. 걷어낸 어둠은 곧 빛에 의해 부정적인 감정 자체를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나아가 환상의 영역 속에서도 빛은 여전히 어둠을 거세하게 만든다. 만약 초원에 누워 있던 것이 죽은 이의 환상이었다면, 전형적인 대비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어둡게 표현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현철 감독은 의도적인 빛을 통하여 죽음의 부정을 제거한다. 나아가 제거된 부정은 기억으로서 재현되고, 버스에서 라디오를 듣던 하은이 새미의 죽음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다르게 말하면 환상의 영역, 기억의 영역에서 비추던 빛이 몰락하는 순간이 버스에 앉아 있는 하은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멜로드라마와 비극
장르적인 영역에서, 멜로드라마에 부합하는 요소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 새미와 하은은 서로의 사랑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이들의 사랑은 자명하다. 나아가 사이에 끼인 역할조차 우정의 영역에서 끼어드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부분과 닮아있다. 다만 비극의 결말을 유도하는 장치가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의 사랑이 퀴어적인 영향력 아래에 존재하기 때문일까? 만약 소수자성에 의한 멜로드라마의 비극을 유도했더라면, 이야기 구조상에서 제3자의 등장은 공허해진다. 나아가 화면이 추구하는 거세된 어둠조차 불가분해질 우려가 있다.
그러기에 감독은 ‘사랑해’라는 나레이션은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애도의 영역과 합쳐진다면, 나레이션은 멜로적 연출의 극한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애도의 영역이 제거된다면 멜로드라마적 연출의 강조에 불과하다는 단점이 명확히 존재한다. 다만 프레임 내부의 배경에서 이 둘의 사랑은 마치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빈 지점이 분명히 보인다. 앞서 말한 초원에 누워 있는 사람, 빈 거울을 클로즈업하거나 빈 정자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여준다면, 이들의 공허함이 극대화될 수 있다. 요컨대 빈 지점의 존재가 작품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이 아니라, 해석의 영역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너와 나>를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퀴어성, 소수자의 사랑을 오히려 한국 사회의 재난, 고등학생으로 설정하여 이들의 결말을 모호하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모호함이 곧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기억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기억은 완전한 현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재해석된다. 감정의 영역으로 빠져들수록 감각은 차단되고, 충격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즉 사랑이 잔재하게 되고, 이들의 사랑은 차연된다. 감정의 차연은 곧 관객에게 전달되어, 이들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새미의 죽음, 하은의 슬픔. 비극에 희생당하는 사람으로 쓰인 영화는 그 자체로 처연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일상을 제거하더라도, 이들이 맞이한 죽음 다음의 세계는 프레임 내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제거된 어둠이야말로, 죽음이 드리우는 부정적 감정에 모체일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끝이 난 이후에 의미가 발생하고 사라진다. <너와 나>의 모호함은 영화가 끝이 난 이후에 관객에게 잔재한다.
잔재한 감정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긴 채,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죽음 다음의 세계를 설명하지도 않고, 거울은 의미가 보류된 채 없어진다. 극의 후반부, 하은은 앵무새에게 ‘사랑해’를 연신 반복한다.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겠지만, 잔재한 의미를 위한 한마디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현실에서 벗어난 영화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하은이 읊조리는 ‘사랑해’는 영화의 위치를 관객의 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기억으로 발현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