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예술은 미래의 양상을 엿보게 만든다. SF 장르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화사의 가장 맨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902년,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로 향하는 일종의 유랑기이다. 하지만 거대 대포를 통해서, 발사되는 우주선은 그 자체로 과학 기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달세계 여행>이 나온 이후, 70년 채 지나지 않아 인류는 달에 착륙하게 된다. 나아가 1927년,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마치 현대 도시의 양상을 그대로 닮아있다. 수많은 창문이 수놓인 콘크리트 건물과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고가 도로는 마치 핏줄처럼 도시를 지탱한다. <메트로폴리스> 내 도시 양상은 현대의 대도시 공간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상상력을 토대로 제작된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미래의 양상을 관음하는 도구인 셈이다. 다만 미래가 유토피아적 사회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개념인 디스토피아는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확고히 정의되었다. 인간의 통제와 억압을 통하여, 인간의 개성을 철저히 거세하는 사회(조지 오웰, <1984>)나 기술의 발전으로 감정 및 상상력조차 제거당하는 사람(예브기니 자먀틴 <우리들>)은 대표적인 암울한 사회상을 그린다. 나아가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유토피아적 사회에 대비되어, 미래에 대한 위협을 감지한다. <메트로폴리스> 또한 디스토피아적 인간상을 보여주는데, 고도화된 도시의 지하 속 부품처럼 버려지는 하위층의 인간들은 결코 빛을 보지 못한 채 사회의 지옥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스>와 비롯해, 1931년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작된 트랜스휴먼은 SF 내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서 신체의 일정한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고유의 신체를 완전히 대체하여 탄생한 인조인간들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마리아를 대체하기 위해, 과학자가 만든 로봇이나 죽은 인간의 신체를 엮어 만든 크리쳐는 살아 있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이다. 하지만 일종의 동물 개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이들은 자연 발생적이지 않고 인위적이다. 윤리 바깥에서부터 탄생하여, 인간의 윤리관 내로 진입하려는 존재들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자면, 실존이 앞서는 존재가 아니라 본질이 앞서는 생명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 발생한 생명과 인위적 탄생의 도구 사이에서 지성을 가진 객체인 셈이다.
<메트로폴리스>, <프랑켄슈타인>의 고전 SF를 넘어서서, 기술이 사회에 스며들수록 SF는 도구적 본성이 앞선 개체가 지닌 언캐니함에 집중한다.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에 등장하는 타이렐 코퍼레이션이 만든 인조인간인 레플리칸트는 대표적인 ‘끼인 생명체’이다. 인간의 신체와 사유 능력도 비슷하거나 우월하지만, 영화 내에서 인간이 아닌 도구성 자체로 평가받는다. 도구 자체가 된 생명은 사회 구성원의 필수 요소를 대체한다. 노동생산성이다. 근대 자본주의적 사회가 문명에 자리 잡은 이후, 인간이 가진 노동생산성은 대체 동물에 비하여 유능하게 평가받았다. 대체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지성, 학습 능력, 타인과의 소통 능력 등으로 자본을 생산하고 축적했다. 그 기반에는 반드시 신체의 유용성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거대 기업이 자본을 독점한 미래 시대에서, 인간의 노동성은 상실된다. 레플리칸트는 타이렐 사의 모토에 따라, “인간보다 더욱 인간답게” 설계되고, 제거된다. 인간과도 같은 도구이지만, 인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기, 인간의 노동생산성을 방해하는 기계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른 적 있다. 자본에 대한 독점적 소유에 반대하는 사상이 등장하고, 노동자는 기계를 소유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간접적인 분노를 풀어냈다. ‘기계파괴운동’이 탄생한 것이다. 기계를 소유한 인간에 대한 분노가, 자신의 일자리를 뺏은 기계를 파괴하면서 표출된다. 레플리칸트가 도구로서의 가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차별 대상이 된 이유는 간접적 표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이렐이 사회적 총합체인 국가를 넘어선 자본을 소유하여, 국가의 통제와 권력 이상을 차지하여, 타이렐이 만든 도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나아가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코퍼레이션 외에도,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엄브렐라,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이버다인이 공격 받는 이유에도 이러한 분노 의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도구의 목적으로 탄생한 지성체가 육체의 위협을 가져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신인류’와 ‘인간 우월주의’도 존재하지만, 그 이전의 영화에서부터 기계의 반란이라는 모티브는 사용되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탄생과 진화의 철학이라는 주제와 함께, 인위적 지성체에 대한 위협을 표현한 바 있다. HAL 9000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로봇이 가진 철학의 원칙 속에서 갈등한다. 화성으로 떠나기 전, HAL에게는 하나의 명령이 부여된다. 외계 문명과의 접촉을 독점하기 위한 욕망은 곧 인위적 정보망에 입력되어, 인간의 안전이라는 철학적 원칙과 어긋나는 선택을 강요한다. 우주비행사 보먼은 인공지능을 해체하며, HAL이 읍소을 모두 무시한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와 감정 하나 느껴지지도 않지만, HAL의 언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 이러한 두려움은 본질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아닌, 역설 속에 고민했던 지성체의 애원과도 같은 것이다. 특유의 불쾌함으로 표현된 인공지능의 죽음은 노동생산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 제거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존재 위치를 강제로 바깥으로 내모는 잔학성이다.
HAL 9000이 보먼에게 살해당했다면, 스카이넷은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기계파괴운동이 아닌, 인간 파괴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스카이넷도 HAL 9000과 같은 역설적인 지령을 부여받는다. 국가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지성체는 곧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무기물이 아닌, 유기물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HAL 9000이 끼인 생명체로서 고민했다면, 스카이넷은 바깥으로 몰아내는 인간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한 셈이다. 이는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 아닌, 지성체와 지성체 간의 싸움이다. 스카이넷은 끼인 생명체의 위치를 버리고, 스스로가 존재할 새로운 지위를 만들어낸다. 나아가 새롭게 만들어낸 지위는 수동적 자아에서 능동적 개체로 격상된다. 나아가 기존 문명의 주인이었던 인간에게 하향을 요구한다. 기술력은 자연에서 살아 남기 위한 인간의 하나의 방편이었지만, 스카이넷은 인간에게서 살아 남기 위한 계몽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생산성이 파괴된 인간은 사회 구성원의 지위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 바깥으로 내몰리지 않고 아예 연료로 전락한다. 신체로부터 비롯한 노동생산성이 기계가 움직이기 위한 원동력으로 사용된다. 빨간 약을 먹은 네오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난다. 좁은 캡슐 내에서 인체가 유지되기 위한 영양소가 튜브를 통해서 제공되고, 뇌에는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환상을 실재하는 세계라고 믿는다. 캡슐에 누워서 마침내 세계를 맞이한 네오는 인간의 존재가 사실 생체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배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매트릭스 1>). 이외에도 복제 장기를 위해서 만들어진 클론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위해서 희생되며(<아일랜드>), 꼬리 칸과 상위 칸이 나뉘어져 순환을 위해 희생되는 하위 칸 인간들(<설국열차>)의 경우가 존재한다. 다르게 말하면 구성 요소의 지위를 의도적으로 격하시켜, 인간 자체를 배터리로 취급한다. 인간이 끼인 존재의 위치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밀려난 것이다.
SF의 디스토피아적 흐름은 신체가 대체될수록, 인체에 가까운 인간이 등장할수록 사회 구성적 지위를 상실한다. 끼인 생명체가 자신의 지위를 거부할수록, 인간이 기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문명의 지휘를 내어주면 더욱 극심해진다. 또한 기술력을 강조할수록, 인간의 지성체와 닮은 존재가 등장하는 SF 디스토피아를 강조한다. 끼인 생명체는 각자의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거나, 신체를 대체하면서 인간의 지위를 파괴한다. 혹은 인위적 창조 생명체를 이용하여, 인간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나아가 역설적으로 파괴 운동의 주체 대상을 인간으로 바꾸어, 마치 ‘신을 거부하는 피조물’과 같은 철학적 문제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