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우리의 시계는 이다지도 빠르게 돌아갈까.
- 따듯한 커피 한 잔의 속도 中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많은 그림과 미술에 대한 서적을 접하게 되었지만, 허나영의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그림을 조금 더 감정에 면밀히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히려 화가의 꿈을 접게 된 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었다는 작가의 발문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처럼 괴로운 나날들, 한치 앞도 볼 수 없이 흔들리며 삶을 나아갈 때, 작가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삶을 받아 들이고, 이를 미술 감상으로서 승화했는지 보여준다.
![[바람부는날이면그림속으로] 앞표지.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3/20260303231324_iyvmdufv.jpg)
이 책은 아홉 챕터로 나뉘어, 각각 감정을 날씨로 은유하며 작가 허나영의 삶과 이야기들을 내려놓는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해 그림을 매개로 함께 이해하게 되며, 막연히 어려웠던 그림에 대해 색다른 감상과 레이어를 거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 안개 낀 아침,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1937)
가끔은 꿈에서도 짙은 안개 속을 헤매었다. (......) 꿈속에서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도 쉽게 손을 놓쳤고, 때로는 누군지 몰라서 선뜻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다가 꿈에서 깨곤 했다. 어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 열심히 달리기만 했던 그 시절의 무의식이 꿈에 반영되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 20p
아무런 설명 없이, 그림을 보거나 미술 서적을 읽으면 그림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리어 막막한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 허나영 개인의 이야기를 따라, 그가 어떤 레이어를 가지고 그림을 느끼고 이해했는지를 보여주어 좋았다. 덩달아 또 다른 관점과 나의 경험을 접목시켜 그림을 한 번 더 보게 되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은 초현실주의의 대표 화가답게 말 그대로 초현실을 담아낸다. 수많은 가능성 중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그림만 보았을 때는 그저 기묘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발작을 일으킨 에피소드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접목시켜 풀어내다 보니 과연 이 그림이 어떤 세계를 담고 있을지, 나 또한 나의 해석을 덧붙여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반복되는 거울상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때, 그 저변에 또다른 내가 있을지, 거울 속의 내가 일치하지 않는 순간이 잠시나마 있을지, 별별 생각을 다 하곤 했다. 인간은 영영 알 수 없는 상자와 같다. 스스로의 마음 속, 그 저변의 통로. 작은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더 없이 무서운 과정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 그림 역시 완벽한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해석과 감각으로 덧입혀 볼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안개 낀 아침의 어스름한 감각처럼.
2. 구름 낀 날,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1889)

빈센트 반 고흐, 『아몬드 나무』(1890)
문득 이 챕터를 읽으면서, 고흐가 특히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그림 뿐만이 아니라, 그의 견뎌온 생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성과주의 나라고, 짧은 기간 고도로 발전해온 나라이다. 그만큼 거기에서 갈려나간 사람들도 많았으며,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이 뒤처질까 아등바등하며 살아왔다.
반 고흐의 이 섬려한 그림들과 거침 없는 화풍은 어떤 쾌감과 동시에 순수한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가 살아온 치열한 삶은 한국인들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끝내 인정해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열패감이었을까?
- 64p
반 고흐는 비운의 천재 화가로, 평생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그림을 놓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가족과의 사랑,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 신에 대한 믿음 등에 대해 그리려고 애썼다.
나 역시 대학 입시를 거치며, 숱한 실패와 주변으로부터의 압박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해야 하는 것과 못하는 것. 그 사이를 맴돌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기대치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순수하게 자기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뛰어든 그를 보면 경탄하게 되고야 만다.
허나영의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이처럼 가장 내밀한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부터 터놓을 수 있도록 내어준다. 사실 이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막상 해보려고 하면 너무 어렵다.
마음의 날씨가 변하는 것, 그것은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다. 기꺼이 품을 삶의 일부이다. 늘 어렵게만 느껴지는 그림을 이렇게 가벼이, 나의 삶 깊숙한 곳에 한 번 거울처럼 비추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