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그녀의 것』을 마주했을 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 석주가 조심스레 내딛던 모든 길목이 나의 과거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열정이 언제나 미지근하다고 느낀다. 스스로 역량이 빼어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혐오의 굴레에 가두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인정하고 나아갈 뿐이다.
처음엔 석주의 살얼음을 걷는 듯한 성격이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 만난 그는 달랐다. 원고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던 '교한서가' 교열부부터,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방황하다 정착한 인문교양 편집부, 새로이 이직한 '산티아고북스'까지. 그가 그려온 편집자로서의 삶은, 어쩌면 내가 끝내 가보지 못한 길의 또 다른 미래는 이랬을 거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백지의 시간과 무모한 정공법
입사 초기, 석주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상태였다. 얼결에 출판사에 발을 들이긴 했지만, 출판의 문법도 편집의 생리도 낯선 외국어 같았다. 그런 그가 선택한 방식은 지독하리만큼 고전적이고 무모했다. 교정지를 통쨰로 필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고의 의무와 평가의 잣대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만의 연습장 안에서 '나라면 이 문장을 어떻게 만졌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자유를 누린다.
누구도 시키기지 않은 막막한 필사의 시간은 석주에게 첫 성장의 마디를 선물한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분투를 선배들이 은연중에 알아채고 있었단 점이다. 타인의 원고를 자신의 손으로 옮겨 적으며 문장의 숨결을 익히던 성실함은 결국 석주를 편집자로 만드는 단단한 밑거름이 된다.
그 대목을 읽으며 잡지의 한 챕터를 기획하는 과제를 앞에 두고 교육원에서 배운 모든 것을 총망라해 한땀한땀 누끼를 따고 글과 그림을 배치하던 밤들이 소환됐다. 과월호를 뒤적이며 구성의 어색함을 바로잡고, 나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가시화하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그 순수한 열망. 잘하고 싶어서 나의 쓰임새를 증명하고 싶어서 쩔쩔매던 그 일주일의 기억이 석주의 필사와 겹쳐져 괜시리 눈물이 차올랐다.
편집이라는 이름의 외줄타기, 그리고 응달의 마음
교정지를 앞에 두고 어쩌지 못하던, 편집자의 주관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지 몰라 소극적으로 굴다 혼이 나고, 때로는 과감히 의견을 개진하다 과하다는 타박을 듣던 석주의 나날들. 그것은 책이라는 물성을 만드는 과정을 넘어 우리가 평생 쏟아야 할 에너지의 총량과 좋아하는 일의 무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석주가 쩔쩔매던 순간들은 곧 글이었고, 동시에 삶이었다.
겁이 많아 안정이란 길로 우회하려 했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아 원점으로 돌아오던 그의 골목길에는 여전히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나는 한때 그것이 미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선택이라는 균형추 앞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놓아야 했던 것들, 체념하며 뒤돌아서야 했던 가보지 못한 길의 뒷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남은 응달이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대단한 사건사고보다는 조금 지루하고 별거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니까. 매일이 속도전처럼 앞다퉈 흐르고 원색적인 도파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석주처럼 매사에 조심스럽던 시절은 차라리 정직하다. 여전히 나는 그러하다. 하지만 석주가 오랜 시간 편집자라는 자리를 지키며 실무에 대한 애정을 인정해 나가는 것처럼, 나 역시 거쳐 가야 했던 부침과 체념 뒤애 굳어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아름다움'이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책을 좋아하나요, 라는 질문 앞에서
출판사 면접이라면 으레 나올 법한 "책을 좋아하나요?"라는 진부한 질문에 돌연 색다르게 다가온 건 석주의 시선 덕분이었다. 너무 오래 그 자리에 머물다 보면 잊게 되는 사회초년생의 설렘과 좌절 그리고 그들이 내는 용기. 석주는 그 질문을 통해 지원자의 서투르지만 가장 예쁜 애정을 확인한다. 과거에 같은 질문 앞에서 당황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결국 백지 위를 채워간 그 미지근한 노력이 쌓여 결국 '오직 그녀의 것'인 삶을 만들어 냈던 우리의 시간을 투영해 본다. 어쩌면 그들도 나에게 그런 면을 보지 않았을까. 자사의 첫 출판 책이 좋았다고 나열하며 쓴 어색한 자기소개서에서, 그리고 실무 경력이 없어 절로 주눅 들지만 좋아하는 마음으로 이겨내겠다고 어필하던 나의 진심을 말이다.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p.264)
저마다의 이유로 나를 선택하지 않았던 곳들도 있었지만 나는 기억한다. 면접이 끝나고 손에 쥐여주던 자사의 책과 한아름 안겨주던 굿즈들. 초라했던 기획안과 교정교열 시험에서 어떤 것을 고쳐야 할지 난감해하며 결국 어느 것도 제대로 고치지 못한 채 내밀었던 새것과 다름없는 교정지를. 그런 과오를 되새기며 '내가 왜'라는 마음을 가지기도,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영하의 기온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던 파주 출판단지로 향하던 그날의 감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도 석주의 자아가, 그리고 조금은 명랑해진 마음이 깃들어 있으니까. 흰색과 검은색밖에 없던 활자의 세계에서 결국 나아갈 길을 찾던 나의 마음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자 예술이었다.
석주가 신생 출판사였던 '산티아고북스'가 대형 출판사로 성장하는 모든 순간에 자리해서 좋았다. 주간이나 총괄이라는 직함에 매몰되지 않고 실무의 찰랑이는 외줄타기를 계속하며 불안마저 사랑으로 보듬어 인자하게 성장해 준 것이 고마웠다. 지루하고 평범해 보이는 삶의 궤적을 묵묵히 밟아가는 이야기는 여전한 나의 책에 대한 끈질긴 사랑을 위로한다. 그녀가 지켜온 미지근하고 질긴 마음은 오늘날 나의 초라한 어휘를 빌려서라도 꼭 기록하고 싶은 소중한 페이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