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닌데.’
소설 원작이 영화로 제작되고, 만화 원작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등 하나의 예술 장르가 다른 장르로 각색되어 재탄생하면 누군가는 기뻐하지만 또 누군가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사람은 무릇 익숙한 대상을 고평가하기 마련이며 ‘형만한 아우 없다’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맞는 구석이 있기에, 원작을 둔 리메이크란 언제나 호평보다는 혹평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 장르인 셈이다.
그러나 원작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도리어 장르의 장점을 십분 살려, 원작과 자기 자신을 이견의 여지 없는 훌륭한 쌍두마차로 자리매김시킨 ‘황금률’ 같은 작품이 있다. 바로 뮤지컬 원작에 기반한 영화 ‘시카고’다.

뮤지컬 ‘시카고’는 1975년 초연을 선보여 필라델피아, 뉴욕, 런던의 웨스트 엔드와 미국의 브로드웨이까지 순차적으로 매료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덕션 중 하나다.
특히 1996년부터 시작된 리바이벌 버전은 장장 29년에 걸쳐 브로드웨이를 점령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관객들을 총성과 재즈 선율이 어우러진 가상의 시카고로 끌어들이고 있다.
얼핏 ‘시카고’는 장르를 변경한 리메이크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모든 연출과 동선 그리고 안무는 ‘쇼’에 가까우며, 무대를 현장감 있게 장악하는 배우들의 ‘주고받기’와 다분히 미국적인 대사 및 구성은 뮤지컬 극장의 무대 위에서 원어로 선보여지는 공연이 아니고서는 본래의 느낌을 온전히 살려내기 몹시 힘들게 한다.
그러나 영화 ‘시카고’는 이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영화라는 장르에서만 활용될 수 있는 연출의 강점을 더해, 원작 뮤지컬의 매력적인 재현을 이룩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예술작품으로 거듭났다.

영화적 연출이 훌륭하게 가미되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해진 대표적인 넘버로 ‘Cell Block Tango’를 들 수 있다.
독방에 수감된 록시의 귓가에 들려오는 수도꼭지의 물방울 소리와 쇠창살을 두드리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넘버의 전주로 전환되고, 쇠창살이 걷히며 독방이었던 배경이 화려한 쇼 무대로 바뀌는 진행은 깔끔하면서도 극적이다. 하이라이트에 접어들면 빨간 조명을 배경으로 수많은 독방들, 이른바 ‘Cell Block’이 깔리며 한층 스케일이 커진 앙상블과 배우들의 합이 실제 무대의 현장감 없이도 보는 이를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유명한 넘버 중 하나인 ‘Razzle Dazzle’ 역시 영화의 연출을 입어 강렬한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원형의 법정, 그리고 법정과 똑같은 원형 구조를 지닌 고혹적인 쇼 무대가 절묘하게 교차편집되어 재판 장면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무채색의 법정과 붉고 반짝이는 쇼 무대의 딱 들어맞는 공존은 오직 영화라는 형식에서만 활용할 수 있는 연출을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풀어낸 보석 같은 장면이다.
그 외에도 ‘We Both Reached For The Gun’, ‘Funny Honey’, ‘Mister Cellophane’ 등 원작 뮤지컬을 수놓은 유수의 넘버들은 쇼 무대와 법정이 교묘하게 어우러진 장면이 되어 저마다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비단 매력적인 장면과 넘버, 연출 구성 외에도 영화 ‘시카고’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주연 배우들의 연기다. 록시 하트 역을 맡은 배우 르네 젤위거는 기존 브로드웨이식 록시 하트의 해석과는 사뭇 다른 자신만의 캐릭터 해석과 연기를 선보여, 뮤지컬에서 느껴지는 록시 하트의 매력과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더불어 벨마 켈리 역을 맡은 배우 캐서린 제타존스는 재즈의 여왕이라는 묘사에 걸맞은 비주얼과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영화의 숨겨진 주인공은 벨마 켈리다’라는 관객들의 평을 이끌어냈다.

원작의 재현에 충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그러나 동시에 개연성과 설득력을 잃지 않는 전개는 ‘시카고’의 또 다른 강점이다. 어느 정도의 뛰어넘기와 공백이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뮤지컬과 달리 영화는 전개 상의 오류나 맹점이 관객들의 눈에 여실히 드러나고야 마는 장르다.
다른 여러 뮤지컬 영화들이 원작 뮤지컬의 음악적 재현에 치중한 나머지 극적 설득력을 잃었다는 비판을 심심찮게 마주하는 와중, 음악성과 줄거리를 모두 잡는 데에 성공한 ‘시카고’는 개봉 후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비할 바 없이 돋보이는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살상도 예술이 될 수 있다 (Who says that murder’s not an art?)’라고 말하는 주인공 록시의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데 있어서도 쓰일 수 있다. 누가 리메이크를 일컬어 열이면 열 원작보다 못한 장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때로 리메이크는 원작 못지않은 예술이 될 수 있다.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까마득한 길을 진작 앞서간 황금률 같은 작품, ‘시카고’가 입증한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