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길을 잃은 여성이 있다.
드넓은 길을 내달리는 차량 속, 휘날리는 머리카락 틈새로 두리번거리는 그가 보인다. 어두운 낯빛으로 연신 지도를 쳐다보다 끝내 고개를 저을 때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오른다. 마침 마주친 가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간다. 그곳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내딛는 걸음의 앞뒤로 자연스럽게 모인다. 마치 그가 주목받아 마땅하다는 듯이.
“실례합니다. 길을 찾고 있는데요.
여기가 어디쯤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표지판도 없더라고요. 여기가 어디죠?”
1961년 7월 스펜서 백작 7세의 셋째 딸로 태어난 다이애나는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을 죄책감 속에 보내야 했고, 7살에는 부모의 이혼을 맞닥뜨려야 했다. 말수가 적은 소극적인 성격에 남 돌보기를 곧잘 하며 배려심 깊은 모습으로 기억되던 그는, 17살에 처음 봤던 찰스 왕세자와 1981년 7월 29일 20살의 나이로 혼인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불륜에 대해 알게 된다.
1996년 언론을 동원해 가까스로 이룩한 이혼 결정이나, 1997년 8월 30일의 교통사고로 인한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다. 〈스펜서〉는 그가 왕세자비가 된 지 10년이 되던 해인 1991년의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그리고 그다음 날을 다룬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전기 영화보다는 한 편의 고딕 소설처럼 이를 풀어간다. 광각으로 잡아내는 흐릿하고도 적막한 바깥 풍경들과 세세하게 부연되는 실내 공간들. 끊임없이 소개되는 의상과 음식의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나열. 전면에 부각되는 다이애나의 표정 변화가 그 양식을 채운다.
단 3일 동안의 다이애나는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대중이 열광하던 가면이 벗겨지자,
갈피를 못 잡고 어그러지던 그의 민낯이 드러난다.
자욱한 안갯속 유령처럼 자리 잡은 샌드링엄 별장은 전통과 엄수해야 할 규칙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식재료를 담은 군부대 차량이나 왕실 가족들이 타고 있어 경비가 붙은 차량. 왕실의 일원으로 각자의 임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과 곳곳에 위치하고 나열되는 사람 아닌 것들까지. 모두들 정시에 정해진 차림으로 계획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분주하게 각을 맞춘다.
발화를 통해서건 화면을 통해서건 이곳에 다이애나가 등장할 때면, 고고한 클래식 위로 한껏 유영하듯 떠도는 재즈가 겹쳐진다. 엄격함이 물씬 풍기는 이 왕실에서 그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남들보다 항상 한 발 느리다는 그는 선물을 뜯어볼 때, 가족사진을 촬영할 때, 식사 시간마다, 심지어 옷을 갈아입을 때에도 매번 제시간에 임하지 못한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증거로 1.4kg은 찌워야 하기에 한 명도 빠짐없이 ‘재미’로 재는 몸무게나 때가 되면 ‘재미’로 하는 꿩 사냥에 그는 불편함을 느낀다. 파파라치를 운운하며 보안 강화를 명목으로 따라붙는 그레고리의 감시나, 두 개의 모습으로 싫어하는 일도 소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찰리의 설파는 그를 숨 막히게 한다. 예외 없는 전통, 왕실에 대한 충성, 국가를 위한 의무.
‘밖에서 들리니 소음은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바느질로 단단히 커튼을 여미는 동안에도, 규율의 횡포에 적응하지 못한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은 무수한 소문으로 퍼져나간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치장 뒤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말을 삼키는 당사자가 있다.
“윌리엄 소령이 다이애나 병사에게 묻겠다.
무엇 때문에 슬픈지 소령에게 말하라.”
“소령님, 무슨 뜻입니까?”
“진실을 말하라.”
“소령님, 과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와 바뀌지 않는 현실. 차갑게 굳어있는 듯한 꿩의 몸 위로 묵직한 영국군의 차가 지나갈 때 느껴지는 아슬아슬함이, 다이애나의 몸에 잔뜩 서린다. 습관적인 거식증은 삼킬 수 없는 왕실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펜치로 팔에 흠집을 내버리는 것은 사방에서 옥죄는 듯한 상황을 끊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것은, 애석하지만 자해라도 시도할 수 있는 유약한 몸이다.
숨조차 편히 내쉬지 못하는 그는 자신을 둘러싼 한기 속에서 고통과 그리움으로 범벅된 환각에 사로잡힌다. 그 여자도 똑같이 받았을 진주 목걸이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보고, 이명같이 울려 퍼지는 파편들의 소리와 함께 400년 전 살았던 앤 불린까지 감각하는 다이애나는 몹시 위태로워 보인다. 불운한 결혼 생활, 남편의 변심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 넘실거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잠식할 것만 같은 기나긴 복도를 걸어갈 때 다이애나는 앤이 되고, 앤은 다이애나가 된다.
“몸이 안 좋다고 전해요.”
“몸이 안 좋다고 전해요.”
“몸이 안 좋다고 전해요!”
구속과 속박,
불안의 공포 중에 점점 미쳐가는 여성상.
그리고 잠시. 다이애나는 오늘날의 어떤 여성들을
마저 떠올리게 한다.
이러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내가 그다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마음. 소위 이 사회에서 히스테리로 불리는 그런 상태가 여성들에게 도사리고 있다. 전혀 다른 세계, 규칙, 질서,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또 전혀 다른 세계, 규칙, 질서, 환경 같지도 않다. 나를 내보이지 말 것. 그들이 원하는 바만 드러낼 것, 만들어낼 것, 맞춰갈 것. 낯설지 않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게 된다. 무너지는 동안의 그를 발견했을 때 상처 입게 된다.
그러나 다시. 다이애나는 죽지 않는다. 이제는 다 썩어버린 자신의 생가 파크 하우스의 계단과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파괴를 실현하려는 찰나, 앤이 그를 붙잡는다.
“다이애나. 그가 그 여자한테 초상화를 줬어.
작은 초상화야. 그 여자는 그걸 목에 걸고 다녔지.
내가 걸고 다니던 것과 같은 초상화였어.
그래서 뜯어버렸지. 가. 도망쳐.”
부들거리는 손끝에서 진주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해어진 다이애나를 뒤로하고 스펜서가 달려 나간다. 스펜서는 왕궁 안에서, 드넓은 복도와 방 중에서, 들판에서, 거리낌 없이 춤을 추고 활보하며 움츠렸던 몸을 편다. 그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은 의심과 두려움에 파묻혀있을 때마다 찾아와주던 매기와의 재회로도 이어진다. 자기가 미쳤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냐는 질문을 들은 그는 차라리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치료는 됐고 전하는 사랑이 필요해요.”
다 해진 자기 가문의 옷을 새로 갖춰 입고 아들들을 구출하기 위해 양 팔을 벌려 사냥터로 걸어 들어가는 스펜서. “시제가 하나뿐이라 미래가 없는” 이곳에서, “과거와 현재는 매한가지”인 이곳에서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눈초리에, 끊이지 않는 억압과 끊이지 않고 감당해야 할 몫들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인가.
그를 조마조마하지 않게 해주는 것은.
그를 살아가게 해주는 것은.
그가 당분간 죽지 않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내게 필요한 건 기적이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대뿐.
내게 필요한 건 기적이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대뿐.
내게 필요한 건 기적이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대뿐.
남은 일생 동안 그대를 사랑할 거야
내게 필요한 건 기적이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대뿐.
내게 필요한 건 기적이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대뿐.
여기 잠시 길을 찾은 여성이 있다.
난간에 기댄 그의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희미하게나마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