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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윤희에게'는 추위는 지겨워지고, 봄이 그리워지는 이맘때 생각나는 영화다.
처음 봤을 땐, 윤희와 쥰의 관계에 집중했으나 다시 보니 윤희와 새봄의 관계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영화에 대한 인상도 처음과 달라졌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도 윤희가 잊지 못했던 것은 윤희의 첫사랑, 쥰이 아니라 쥰과 함께 한 충만했던 그 시절, 당차고 순수했던 윤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희의 딸, 새봄은 늘 경직되어 있는 윤희와 달리 대담하고 거침이 없다. 여자친구가 생긴 아빠에게, “아빠 저분한테 잘해”라고 말하는 덤덤함에서, 외로워 보이는 윤희에겐 ‘대학가면 집에 안 올테니 엄마 인생을 살라’고 말하는 담대함에서 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쥰의 편지를 받고 망설이는 윤희에게 ‘눈이 오는 곳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새봄이다.
한마디로 새봄은 적막한 이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윤희의 딸이지만, 윤희와는 참 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영화의 초반, 새봄의 질문에 대한 용호(윤희의 오빠이자 새봄의 삼촌)의 대답이 의미심장한데, 새봄이 윤희를 닮았다는 것이다. 새봄의 사진을 찍어주던 용호는 아빠를 닮은 것 같다는 새봄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새봄이는 엄마를 닮았지. 특히 그렇게 웃을 때 많이 닮았지.’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새봄이 앉아 있던 자리엔 윤희가 앉아있다. 이 대화, 그리고 장면의 연결은 쥰과 함께 했던 윤희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관객이 볼 수 없는 윤희의 어린 시절은 새봄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을까.
아마도 윤희는 새봄처럼 꿈이 많은 아이였을 것이다. 대학도 가고, 연애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약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쥰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윤희를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도록 했다.
무엇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윤희는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옆으로 기차가 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회색 승합차에 몸을 싣는 윤희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렇듯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꿈’이라는 단어는 한 가지 의미로 정의할 수 없다. 쥰과 윤희가 말하는 ‘꿈’에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순수하게 좋아했던 마음과 미처 이루지 못한 소망들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이란 억압된 욕망이 발현되는 무의식의 공간이듯, 쥰과 윤희의 꿈속엔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어 쌓여 있다. 그 마음들이 눈처럼 쌓여 쥰과 윤희를 가뒀기에, 쥰은 늘 솔직하지 못했으며, 윤희는 스스로를 벌주듯 살아왔다.
그래서 영화는 서랍장 속 편지를 꺼내 우체통에 넣기를 택하는데, 그제야 얼어붙었던 마음에 봄의 기운이 찾아온다. 바로, 새봄이다. 새봄은 눈이 산처럼 쌓여 있는 오타루에서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는 새봄의 선언처럼, 새봄이 셔터를 누르면 평범한 순간도 아름다운 장면이 된다. 마침내 새봄이 쥰과 윤희를 이어주고 나면, 그 순간도 셔터를 누른 듯 따뜻한 장면이 되어 기억 속에 남는다. 오타루를 헤집고 다니는 새봄의 움직임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영화의 시작은 오타루의 겨울이었으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봄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윤희에게’는 시작을 말한다. 그렇게 잊어버렸던 꿈을 다시 찾으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