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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인생에 형광펜을 칠하자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는 가장 사소한 방법

by 양혜정 에디터
2026.01.19 12:35

 

 

2025년은 나에게 몹시 숨가쁜 한 해였다. 대학원에서의 2년을 매듭짓는 졸업논문을 완성시키기 위해 쉼 없이 달렸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 채, 숲을 보기보다 눈앞의 나무에 집중하며 당장 급한 과제들을 격파해 나가는 몇 달이었다. 이해도 잘 가지 않는 영어 논문들을 들여다보느라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에 잠들고, 몇 시간 후 일어나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저녁에는 대학원 연구실로 향했다. 그닥 성과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밤이었다. 침대에 누우면 오늘 하루가 통째로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었다. 이 때문에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야 타임 다이어리.

 

타임 다이어리, 혹은 1시간 다이어리라고 불리는 기록법은 이미 많은 ‘다꾸러(다이어리 꾸미기 애호가)’들 사이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뜰때부터 잠에 들기까지 내가 어떤 행동을 했고 무엇에 시간을 쏟았고 어떤 음식으로 배를 채웠는지 모두 기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맞춤형으로 디자인된 다이어리들이 이미 시중에 많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반짝이는 기록들 앞에 썩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예쁜 다이어리가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하루를 마주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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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내 방식을 만들기로 했다. 무인양품에 들러 2,500원짜리 무지 문고본 노트를 장만했다. 표지가 너무 얇고 약하길래 pvc 다이어리 커버도 씌워주었다. 언제 사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귀여운 엽서를 끼워넣어 나만의 표지도 만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기성품에 정을 주고 친해지는 과정이다.


기록은 9월 1일부터 시작했다. 하루에 두 페이지. 왼쪽 면에는 나의 24시간을 기록하고, 오른쪽 면에는 그날의 기분과 감사했던 일, 나를 칭찬해주고픈 일, 가장 노력했던 일, 내일의 계획 등을 적었다. 내가 어디에 얼마나 시간을 할애했는지 한 눈에 보기 위해 형광펜 색으로 카테고리를 나누었다. 핑크는 논문과 연구, 형광노랑은 학교 수업과 과제, 파랑은 외출, 연두는 수면, 연보라색은 전시나 영화 등 문화생활, 회색은 노동이었다. 색을 고르는 일은 내가 내 삶에 붙이는 이름표 같았다. 이 시간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정해주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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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시작한 초반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흘려보내는 시간이 이다지도 많았음에 깜짝 놀랐다. 내가 나눠놓은 카테고리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형광펜을 칠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비워두는 칸이 절반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의 페이지가 점점 늘어나도 이런 공백들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이 쌓일수록, 공백보다는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진 칸들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내가 무엇에 시간을 들이고 있는지, 나의 일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록이 나를 더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록을 한다고 해서 내가 보던 유튜브를 그만 보지도 않았으며 주말에 늘어지게 자던 늦잠을 고치지도 않았다. 대신 기록은 나를 더 정직한 사람이 되게 했다. 이는 곧 뿌듯한 하루뿐 아니라 외면하고 싶었던 하루까지도 그대로 마주하고 면적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던 시간도 면적을 갖고 양감을 가지며 새로운 의미가 되었다.

 

우리의 인생에는 환희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쁜 일도, 또 그렇다고 완전히 절망의 구렁텅이에 박혀버릴 만큼 끔찍한 일도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 인생이 180도 바뀔 만큼 대단한 일은 없지만, 매일매일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절대로 다시 겪을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 양감을 주기 위해 형광펜을 칠해보자.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중요한 문장에 형광펜을 칠했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기록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작은 색들이 모여 나의 인생을 보여주는 패치워크 작품이 될 줄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 앞에 서서 내 매일매일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들여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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