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에 관례처럼 오고 가는 질문이 있다. 나는 웬만하면 이런 질문들을 잘 받지 않는 편이었는데, 2025년에는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회사 분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이 질문들을 받은 것 같다.
“작년 한 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아쉬웠던 일이 있었어요?”
“지현 님은 올해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일단, 내가 그리는 새해의 내 마음가짐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계획을 잘 세우지도 않고, 정말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기록을 남겨두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저런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렷한 새해의 다짐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새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보다는 약간의 현실적인 온도가 먼저 느껴진다. 예전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난 것만 같아 조금 씁쓸한 느낌도 든다.
작년 12월 초부터는 회사 일이 꽤 바빴다. 외부 행사 준비와 내부에서 진행하는 큼직한 캠페인들이 겹치면서, 업무 일지를 열어 보면 해야 할 일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일들이 처리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프게도 이 쌓여 있는 일의 여파에서 지금도 벗어나진 못한 상황이다) 아직은 몸도 마음도 그 속도에 익숙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시기인 듯하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다 보니, ‘내가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건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대신 잘 해내고 있는지, 잘 버티고 있는지가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 매일의 목표가 되었고, 별 탈 없이 넘어가면 충분한 하루라고 자신을 설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쌓인 날들이 어느새 꽤 길어졌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문득, 이제 나 자신에게도 다른 기준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무언가를 크게 바꾸겠다는 원대한 결심이라기보다는, 지금의 리듬을 그대로 두는 것이 과연 나에게 최선일지에 관한 질문에 가까웠다.
요즘의 나는 조금 느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너무 채찍질하지 않고 싶은 것이다. 현재를 빠르게 지나치며 늘 기계처럼 다음 일을 떠올리는 습관에서 잠시 벗어나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하루가 촘촘하게 꽉 차 있으면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빈틈없이 적힌 투두 리스트가 나를 더욱 성실하고 알찬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믿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이게 어쩌면 나를 조금씩 무딘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워보지 않았던 올해의 목표를 세워보려고 한다. 바로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거창한 변화나 새로운 계획은 아니고, 지금까지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조금 다르게 쓰는 방향으로 말이다.
자기 전에 하루가 어땠는지 잠깐 돌아보고, 해야 할 일보다 그날의 기분을 먼저 떠올려보는 것, 하루의 표정은 어땠는지를 가볍게 되짚어 보는 것 등…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압박 대신 이미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간단한 되새김질 겸 수긍 같은 것들을 해보려고 한다.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전보다 조금 더 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쓰는 것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2026년의 나는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덜 놓치며 지나가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예전에 ‘빨리 걷기보다는 하늘을 보며 걷고, 천천히 걷는 것’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올해는 그 태도를 걷기라는 행위 너머의 일상으로 확장해 보고 싶다.
아주 조용하지만 나름의 방향성은 분명한, 이전의 새해와는 다른 새해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시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