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떼지 않고 선을 이어간다. 기억해 둔 모든 점을 하나씩, 한 번씩 거쳐 간다. 결코 붓을 들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느낀다.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으로, 하얗게 눈 덮인 지면紙面 위를 발자국을 꾹꾹 남기며 걷는다. 아직 시작점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다. 그어온 선을 좇아온 누군가, 언젠가, 네가. 그 뒤를 이어주리라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완성되지 않은 한붓그리기에 관한 이야기다.
잊지 않기 위해서
선을 잇기란 어렵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던 눈발 속에서 경하가 걸어간 길이 비틀댄다. 사실 그 이전부터도 경하의 길은 반듯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던 경하는 아내 혹은 엄마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사이를 왕복하며 지그재그로 달려간다. 폭력적으로 직진하다 거울에 닿자마자 다른 방향으로 튀어 버리는 빛줄기처럼 자기 자신을 꺾어가며 글을 쓰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이렇게 꺾이고, 또 그 반대로 꺾이다 멀어진 가족과의 벽에 채 닿지 못한 채로 더는 튕기지 못하고 고꾸라진다.
학살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소설을 위한 자료조사만으로도 경하는 깊은 트라우마를 몸소 체험한다. 예비군의 행군 현장을 보고 침이 마르고, 경계를 곤두세운다. 경하는 4.3 사건의 당사자도, 그 유족도 아니지만 그 역사를 알고 있기에 깊이 몰입하게 되며, 이를 내면화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과거는 그만큼 무겁고, 끈질기고, 버겁다. 그럼에도 경하가 잇고자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진짜 작별 인사를, 제대로.
선은 끊어내기도 어렵다. 발걸음을 멈추고자 할 때에도 스스로도 지겨울 정도로 끈질기게 살아간다. 수차례 작별을 거치고 결국 살아낸 경하에게 친구 인선이 문자를 보낸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지금 와달라는 것이다. 경하와 함께하기로 한 프로젝트를 위해 통나무를 다듬다 전기톱에 손가락이 절단된 인선은 집에 두고 온 앵무새 아마에게 밥을 달라며 제주 본가로 내려가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부탁하던 인선은 3분마다 봉합된 부위에 바늘을 찔러 넣어 피를 뽑는다. 상처를 후벼파는 고통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하는 그녀는 손가락을 포기할 수조차 없다. 신경이 끊기더라도 그 고통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제주에 도착한 경하는 온 세상인 듯 퍼붓는 눈보라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고, 발목 밑으로 감각이 없어져도 인선의 집에 도착하고야 만다. 아마를 묻어준 경하는 인선에 대해 생각한다. 인선과 함께하려 한 프로젝트를 떠올린다. 아흔아홉 그루의 검은 통나무를 심어 눈 날리던 때 영상으로 남기려던 것을. 더 이상 진행하지 말자며 인선을 만류했지만, 그녀가 꿋꿋하게 다듬어 늘어놓은 나무들을 본다. 한데 웅크린 나무들의 꿈을 상기하며 인선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제주 사람들을 새긴다. 어느새 돌아온 아마와 인선을 맞이하며 소리에 눈에 빨려 들어가듯 홀린 것처럼 인선의 방에서 과거 저편으로 넘어간다.
지극한 그 끝으로
제주의 4월 3일은 희다. 태양을 통과한 빛이 푸른 바다를, 붉은 학살의 현장을, 푸른 잎들을 닮아가며 하나로 모인다. 눈처럼 하얀 빛이 꺼지지 않고 가슴이 시큰거리도록 타오를 때, 활활 불이 일어날 때. 인선은 살아남은 어머니의 자취를 따라간다. 1948년 제주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으로서 남은 평생을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육지와 섬을 번갈아 가며 다니는 모든 과정에서 강정심의 마음은 가족과 작별하지 않는다.
하늘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산소는 부족해지고 사위는 캄캄해진다. 새조차도 그만큼 높은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올라가려던 그 끝이 너무나 멀리 있고, 내가 서있는 이 바닥이 너무나 깊다. 반대일 수도 있다. 내가 서있는 이곳은 당신이 묻힌 그곳에 비해 너무나 높다. 당신을 찾을 수 없는 내가 겪는 고통이 극과 극일지라도 결국 당신이 겪었던 고통과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기를 어렴풋이 바랐을지도 모른다. 경하가 보던 바다도 이를 아는지 점점 깊어지고만 있다.
사선으로 넘나들기
이 소설에서 모든 이야기는 전부 큰따옴표 없이 이탤릭체로 기울어져 있다. 그 서사들이 바람에 휩쓸려 흘러내리는 눈발처럼 허공에 빗금을 그으며 심장에 꽂힌다.
큰 산 아랫마을의 모든 대문을 두드려 끼니를 청했으나 거절당한 늙은 걸인이 오직 한 여자에게서 밥 한 그릇을 얻는다. 고마움의 표시로 그가 말한다. 내일 동트기 전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산을 오르라고. 산을 넘어갈 때까지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노인의 말대로 여자가 산중턱에 다다랐을 때 해일이나 폭우가 마을을 삼킨다. 예외 없이 그녀는 뒤돌아본다. 그곳에서 돌이 된다.
경하가 생각한 뒤돌아본 여자의 이야기는 정심의 이야기와 닮았다. 몸이 굳어가는 걸,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 뒤쪽에 시선이 놓인다.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가던 동생, 행방을 알 수 없는 오빠, 그리고 구덩이로 빠지던 그 많은 제주 사람까지. 결국 인선의 해석대로 정심은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 기억에 빠진다. 반복한다. 날이면 날마다 인선의 손을 꽉 붙잡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내게 간직할 수 있는 기억의 양이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주저 없이 과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작별하지 않기 위해서,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엄마는 장사같이 힘이 셌어.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마친 뒤에도 힘껏 내 손을 움켜쥐고 있었어. 손목이 저리고 아파서 뿌리치고 싶을 만큼. 칼질을 하다 손가락에서 피가 날 때마다 생각났다고 엄마는 말했어. 손톱을 깊이 깎아서 상처가 날 때마다. 덜 아문 자리에 실수로 소금이 닿을 때마다 생각났다고 했어. 어둠 속에서 옴죽옴죽 엄마 손가락을 빨던 입이.
정심은 여전히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 있다.
사람의 선으로
선을 잊기란 어렵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에게 어떤 짓을 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아도, 이어 긋는 마음은 신념이다. 인선이 경하에게 검은 통나무를 심을 땅을 보여주겠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양초를 들고 밤의 끝으로 향한다. 어머니와 작별한 후 어머니가 모으던 자료의 빈자리를 새로 채우겠노라 다짐했던 이야기를 한다. 경하와의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눈 속에서 눈을 감으며 바란다. 인선의 선善이 이어지기를.
정심의 붓은 인선의 손에 쥐어진다. 이제 인선의 손에 경하의 손이 겹친다. 이어 잡은 그들이 그리는 선엔 이리저리 삐침이 있고, 굴곡이 있고, 더딤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당신이 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선은 인간에서 인간을 향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사람人의 선線이다.
생을 가졌거나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이 옆으로 반듯하게 한 줄로 서서 손을 잡는다. 그 사람들이 내디딘 한 걸음들은 위에선 기나긴 심전도 그래프를 만든다. 각자의 보폭과 속도가 다름이 그 이유다. 곡선은 유연하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바람 앞에, 눈보라에 구부러지지만 단단히 서로를 붙잡아 단절되지 않는다. 누군가 유난히 앞서거나 뒤처져도, 박자가 맞지 않아도 괜찮다. 어쨌거나 살아 있다면 이어질 수 있는 선이다. 그 수많은 한 걸음만 모인다면.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과거를 되살릴 때까지 손가락으로 앞의 선을 따라가 본다. 멈춰 선 그곳에서부터 우리 손으로 이어가야만 한다. 끝나지 않은
한붓그리기를 하면서, 언젠가 닿을 진실의 꼭짓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