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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로드무비다. 서사가 진행되는 주요 공간은 이동하는 자동차 안이며, 공간과 시간은 변화한다. 이와 반대로 가후쿠는 이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리적 위치가 아닌 심리적 위치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그는 교통사고로 방문한 병원에서 녹내장을 진단받은 후, 덤덤한 표정으로 질문한다.
“운전은 가능합니까?”
그의 차 ‘사브’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는 공간의 물리적 특성과 연결해 볼 수 있다. 자동차는 이동수단이다. 빠르게 달리는 차 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변화무쌍하다. 그의 삶은 어쩌면 창문 밖 풍경처럼 보인다. 딸의 죽음, 아내의 외도, 아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풍경 속에 그를 놓는다. 그러나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명백하게 밖의 풍경과 다르다. 차의 내부는 바깥과 신체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며, 움직임을 제한한다. 차 안은 외부로부터 안전하다. 요약컨대 무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과거의 상처와 부딪히는 것을 거부한 채로, 무감각하게 사는 것. '사브'는 가후쿠의 결함이자,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위치의 충돌은 가후쿠가 놓인 자리를 선명하게 비춘다. 그는 감각하는 것을 거부한 채로 앉아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계속 달리고 있다.
2. 그가 이동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평화의 축선)
가후쿠는 새롭게 고용된 운전사, 미사키와 관계맺음으로써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사키는 그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그를 밖으로 꺼낸다. 가령 ‘어디든 가달라’는 그의 부탁에 그녀는 히로시마 쓰레기 소각장으로 향한다. 예정된 경로를 벗어나 도착한 그곳은 영화의 변곡점이자 앞으로의 여정을 암시한다.
“이쪽으로 쭉 가면 평화공원입니다. 원폭 돔과 위령비를 잇는 선은 평화의 축선이라 불립니다.”
미사키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이 도착한 히로시마 쓰레기 소각장은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원폭 돔과 미래의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후 영화는 정확히 과거-현재-미래로 나아간다. 우선 미사키의 고향, 훗카이도로 향한다. 마치 미사키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듯한 여정의 끝에는 눈이 소복이 쌓인 설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들은 추위가 오롯이 전해지는 바깥으로 나와 산사태로 무너진 미사키의 집이자, 과거의 잔해 앞에 선다. 드디어, 그가 토해내듯 말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받았어야 했어.”
“그래서 난 오토를 잃은 거야 영원히”
“오토가 보고싶어”
“만나면 화를 내고 싶어. 책망하고 싶어”
“사과하고 싶어.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은걸.”
“돌아와줬으면 좋겠어. 살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 오토가 보고싶어.”
“하지만 이제 늦었어.”
무의식의 발현으로 보이는 그의 말에는 상반된 감정의 충돌, 후회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영화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지연시켰던, 마음껏 상처받고 후회하고 책망하는 그 장면에 당도한 시점이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바냐 아저씨'를 연기하고 있다. 고통과 직면하는 그의 모습은 사브 안에 앉아 있는 무표정의 얼굴과 구별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신에 당도하면, 관객석에 앉아 있던 미사키가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 장을 본 미사키는 빨간색 차에 타 강아지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줄곧 자동차가 지나온 길을 담아내던 카메라는 이제 그녀의 시점으로 길을 응시한다. 그것은 앞으로 미사키가 지나게 될 새로운 길이다.
요컨대 이들의 여정은 서로의 과거를 마주하고, 부딪히고, 나아가는 평화의 축선을 연상시킨다.
3. 그 순간이 왔다. (언어의 한계 속에서 발견된 진심)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말이 많다.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예찬이라기보다, 한계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이를테면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오토(가후쿠의 아내)는 가후쿠에게 대화를 요청한다. 대화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진심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즉, 오토의 쇼트는 가후쿠의 리액션 쇼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극의 초반 배치된 오토의 액션 쇼트는 극의 후반에 가서야 가후쿠의 리액션 쇼트를 받는다. 이처럼 류스케 감독의 영화에서 언어는 적정한 때를 놓치고, 진심과 어긋나버린다.
역설적으로 언어의 한계는 ‘무언가 일어난 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하는데, '무언가 일어난 순간'은 ‘진실된’으로 치환해도 될 것이다. '진실된 순간'이란 문예 감독 윤수, 그의 아내 유나와 그가 함께 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유나는 가후쿠의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이자, 농인으로 남편, 윤수는 유나의 언어를 통역한다. 유나는 연습할 때 힘든 점이 없냐는 가후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저한텐 평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가능해요.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어요."
윤수는 유나의 손짓을 천천히 따라가며, 가후쿠에게 전달한다. 이때 그녀와 주변 인물을 함께 찍던 카메라는 그녀를 정면에서 단독으로 담아내기 시작한다. 시선을 분산시켰던 외부 요소들이 사라지고, 관객은 자연스레 그녀의 손짓을 보고 듣는다. 어쩌면 가후쿠-오토의 어긋난 대화 사이에서 목격한 유나-윤수-가후쿠의 대화는 진실된 무엇이다. 이것을 타인의 언어를 보고 듣는 행위를 지속했을 때,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진실된 순간이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