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지도자들은 별과 하늘의 무늬를 읽으며 땅 위의 생명들을 살폈다. 농업이 국가 경제 기반이었던 옛 왕조 국가에선 천문(天文)은 국가 권력의 핵심이었다. 천문은 하늘에 나타난 별들의 운행을 무늬(文)로 표상하는 학문이다. 왕권과 국가, 백성의 안위를 위해선 하늘의 움직임을 온전히 읽어내야만 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은 땅, 즉 인간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천문(天文)은 인문(人文)이요,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었다.
그의 모든 흔적 불태워 없애라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세종대왕은 명나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 과학 기술을 이룩하고, 조선만의 하늘을 만들고자 했다.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한 실용주의자 세종은 하늘에서 내린 재주를 타고난 기술자 장영실을 곁에 두고 아꼈다. 노비였던 장영실은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대호군의 자리까지 올랐다. 세종의 어명을 받들어 명나라를 유학한 장영실은 자격루(물시계), 혼천의(천체관측 기구), 측우기(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로 표준화된 강우량 측정 기구)를 만들며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영실은 어느 순간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1442년, 세종의 행차에 쓸 가마가 부서진다. 왕의 옥체를 상하게 한 가마 사건의 총책임자였던 장영실은 장형을 받고 파직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노비 출신 기술자, 왕의 총애를 받았던 충신, 서양보다 앞선 기술을 조선 초기에 완성한(장영실이 제작한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강우량 측정기보다 200여 년을 앞선다) 통찰력과 선구안을 가진 천재이기도 했던 장영실. 따라서 가마 사건 후 증발한 장영실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의문과 추측을 남긴다. 그가 세웠던 수많은 공은 조선 초기 과학의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가마 사건 당시 장영실은 이미 고령이라 그 후 행적은 없다는 가설, 장영실의 업적을 축소·제거하기 위해 기록을 삭제했단 음모론 등 여러 가정이 미스터리한 그의 삶을 추적한다.
이상훈 작가 소설 <한복 입은 남자>는 루벤스 그림 ‘한복 입은 남자’ 속 인물이 장영실이란 가설까지 더해, 가마 사건 후 텅 빈 장영실 삶의 여백을 채운 작품이다. 소설 <한복 입은 남자>는 가마 사건으로 조선을 떠나 유럽으로 간 장영실이 다빈치를 만나며, 르네상스의 기틀을 세웠단 상상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픽션이다.
그대 꿈이 내게 한 겹, 그대 생각이 또 한 겹
<웃는 남자>, <엑스칼리버>, <프리다>, <베토벤>, <베르사유의 장미> 등 꾸준히 창작 뮤지컬을 선보이는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의 또 다른 창작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했다. 충무아트센터 개관 20주년 기념 공연이자 EMK의 열 번째 창작 뮤지컬인 <한복 입은 남자>는 제작 소식이 전해질 때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다. 주로 유럽 배경의 라이센스, 혹은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던 EMK뮤지컬컴퍼니가 조선을 배경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원작 소설처럼 대한민국·조선·유럽 세 배경으로 전개된다. 장영실의 비망록과 루벤스 그림 ‘한복 입은 남자’의 비밀을 추적하는 대한민국의 진석·강배·엘레나·마 교수, 조선 과학 기술 발전에 힘을 쏟았던 세종과 장영실, 유럽에서 다빈치를 만나는 장영실까지. 원작을 충실히 따르는 뮤지컬은 인물들 대부분을 1인 2역, 혹은 1인 3역으로 배치해 배우들의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였다.
소설에선 대한민국은 다큐멘터리 PD 진석, 조선은 장영실의 시점으로 전개하며 사실상 장영실이 작품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반면 뮤지컬은 조선의 장영실과 대한민국의 학자 강배를 1인 2역으로, 조선의 세종과 대한민국의 진석을 1인 2역으로 설정해 남성 배우 투톱 체제로 극을 이끌어간다. 이는 2014년 뉴컨텐츠컴퍼니에서 제작했으며, 현재는 EMK뮤지컬컴퍼니 소속 뮤지컬인 <프랑켄슈타인> 인물 구성을 연상시킨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넘버는 <프랑켄슈타인>, <벤허>의 곡을 쓴 이성준(브랜든 리) 음악감독이 작곡했다. EMK뮤지컬컴퍼니는 개막 전 영실 넘버 ‘그리웁다’, ‘비차’,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진석 넘버 ‘한복 입은 남자’, 세종 넘버 ‘너만의 별에’를 공개했다. 해당 넘버들은 핵심 장면들에 배치돼,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살리며 굵직한 서사를 전개했다. 대부분 조선 배경인 1막 단체곡에선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과 같은 전통 음악 선율을 활용하기도 했다.
‘조선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이 유럽으로 가 르네상스의 기틀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에 뮤지컬은 ‘한복 입은 남자’ 그림 속 인물이 명나라 상인으로 정체가 밝혀졌단 대사를 추가했으며(<한복 입은 남자> 소설은 2014년에 출간됐으며, 그림 속 인물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역사 왜곡’이란 말 또한 대사에 넣어 논란을 의식한 듯한 행보를 보였다. 원작 소설을 따른 작품이기에, 주장과 논거는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최소한의 완충 장치도 함께 마련한 것이다.
드레스 리허설을 거쳐 2025년 12월 2일에 정식 개막, 2026년 3월 8일에 막을 내리는 작품은 관객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며 순항 중이다. 원작 핵심 주장과 방대한 서사를 거의 그대로 무대화해 이에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이 이어졌다. 18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비슷한 의미를 담고 반복되는 특정 장면들은 축소되길 바란단 논의도 많았다. 반동 인물들(병조판서 이암·교황·명나라 환관 이상인)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장면들(대사, 넘버, 안무)이 극의 밀도를 높이는 덴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단 이야기 또한 있었다.
하지만 장영실과 세종의 깊은 감정선 및 서사, 조선 과학 발전을 꿈꾸는 이들(세종·장영실·정의공주)의 애틋한 마음, 벗을 지키는 죽마고우 만복과 장영실의 절절한 우정, 비차(飛車 : 극 중 장영실이 만드는 비행 물체. 비차가 다빈치 비행기 설계도에 영감을 줬단 주장이 작품에 포함됐다)를 만들며 하늘을 나는 꿈을 품은 조선의 장영실과 비행기를 타는 게 일상이 된 대한민국의 진석이 만나는 엔딩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공들인 무대, 별·밤하늘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조명 또한 감탄을 자아냈다. 무대에서 보고 들으니, 선율과 노랫말이 훨씬 생생하게 와닿는단 평을 듣는 넘버들 또한 배우들의 훌륭한 기량과 함께 펼쳐지고 있다.
2023년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된 창작 뮤지컬 <베토벤> 또한 개막과 동시에 다양한 평이 나왔다. EMK뮤지컬컴퍼니는 인스타그램 후기 이벤트를 여러 차례 열며 관객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폐막까지 작품을 수정했다. 대극장 뮤지컬은 수많은 이들의 약속으로 이뤄진 장르이기에 개막 후 수정을 이어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베토벤>은 정체하지 않고, 진화를 이어가며 마침내 관객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여러 담론을 생산 중인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또한 일부 장면들을 수정하며 공연 중이다. 창작 초연이기에 다양한 논의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수많은 이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됐으며, 이미 여러 장점이 있는 만큼 <베토벤> 선례처럼 발전적 방향으로 작품이 거듭날 거라고 관객은 믿고 있다. 극 중 장영실이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비차를 계속 다시 만든 것처럼, <한복 입은 남자> 또한 더 완성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비상할 것이다.
살아, 살아라, 살아봐야 별에 닿아
2025년 12월 11일 오후 7시 30분 공연엔 박은태와 카이가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캐스팅 발표 당시 박은태와 카이가 같은 작품 속 다른 역할로 무대에 선단 소식에 관객은 열광했다. 그들은 같은 작품의 같은 역할로만 출연해 왔기 때문이다.
박은태와 카이는 <프랑켄슈타인> 앙리 뒤프레·괴물, <팬텀> 에릭, <벤허> 유다 벤허, <더 라스트 키스>(<황태자 루돌프>) 루돌프, <지킬 앤 하이드> 지킬·하이드,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등 여러 차례 같은 캐릭터를 노래하고 연기했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에선 박은태는 장영실과 오강배 역할로, 카이는 세종과 박진석 역에 캐스팅됐다.
‘같극타캐’, 즉 상대역으론 처음 무대에 선 그들의 음색 합과 연기 케미스트리는 안정적이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같은 역할을 연기했지만, <프랑켄슈타인> 등의 작품에선 캐릭터 표현 방식이 전혀 달랐다. 다른 캐릭터로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야 하는 <한복 입은 남자>에선 오랫동안 함께한 시간과 동료애, 깊은 내공을 증명하며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박은태는 2010년, 2011년 <피맛골 연가> 후 오랜만에 조선 사극 뮤지컬에 출연했다. 그는 2011년 <거미여인의 키스> 연극 무대에 선 것을 제외하곤, 2006년 <라이온킹>으로 데뷔한 후 대극장 뮤지컬 위주로 활동하며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박은태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목소리와 섬세한 연기, 날카로운 고음, 뛰어난 캐릭터 및 작품 해석력, 예측을 벗어나는 폭넓은 작품 선택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며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은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 몬티, <킹키부츠> 롤라, <웃는 남자> 그윈플렌, 2025년 9월엔 첫 단독 콘서트
박은태의 장영실은 꿈꾸는 자의 순수함과 절실함, 반짝이는 열망이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소중한 이와 꿈을 잃고 고향 땅을 떠나야 할 땐 절절하면서도 폭발적인 넘버 소화와 감정 연기를 펼쳤다. 먼 이국에서 조선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 장영실을 연기할 땐, 일생의 회한이 담긴 처연한 감정선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며 객석을 눈물짓게 했다.
카이는 일제강점기 배경 뮤지컬 <아리랑> 2015년 초연 당시 악역 양치성을 연기했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를 다루는 사극 뮤지컬 출연은 처음이다. 주로 유럽 배경의 스케일 큰 대극장 뮤지컬에 출연해 온 카이는 선 굵고 강렬하면서도 슬픔과 고독이 묻어나는 연기, 클래식·성악 기반의 웅장한 발성과 압도적인 넘버 소화력으로 관객의 두터운 신뢰와 연이은 선택을 받고 있다. <레드>, <라스트 세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등 소극장 연극에도 꾸준히 도전하는 카이는 국내와 해외를 넘나드는 다수의 콘서트 및 음반 발매, 방송 및 영화 출연, 도서 출간, 후학 양성에도 힘쓰며 커리어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카이의 세종은 압도적인 존재감과 위엄있는 음색, 풍부한 성량으로 객석을 숨죽이게 했다. 그는 첫 공연 무대 인사에서 카이라는 이름으로 세종을 연기해 죄송하다고 농담한 바 있다. 하지만 치열한 연구와 깊이가 담긴 그의 세종은 새로운 인생 캐릭터였다. 세종의 묵직함을 덜어낸 카이의 진석 또한 때론 신념 있게, 때론 담백하게 극을 이끌며 관객을 설득했다.
오랫동안 여러 활동을 해왔으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박은태와 카이는 지독한 워커홀릭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대한민국 뮤지컬 역사에 영원히 새겨진 전설이 됐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대와 업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선배로서 유의미한 행보를 걷고 있다.
박은태는 2025년 9월 2일 한국뮤지컬어워즈 프로그램의 하나로 열린 ‘뮤지컬 포럼 2025’에서 데뷔 전인 학생들 및 신인 배우들을 위한 육성 프로그램과 공공 인큐베이팅 시스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무대에 서든 못 서든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배우들을 위한 멘탈 케어 시스템 및 심리 상담·sns 활용 교육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카이는 2022년부터 한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초빙 교수를 거쳐, 2025년 현재는 정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렇듯 이미 제자들을 육성 중인 카이는, 교단에 서기 훨씬 전부터 청소년들에게 공연 관람의 추억을 선물하는 자선 프로그램 ‘뮤드림’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경향뮤지컬콩쿠르’에서 여러 해 동안 ‘카이장학금’을 운영하며 학생들의 꿈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박은태와 카이의 이러한 활동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다면 보여줄 필요가 없는 모습이다. 이들은 신인 시절을 버텨낸 지 한참이 지났고, 대극장 뮤지컬 주연 배우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이며, 무대뿐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활동 중이고, 굳건한 실력과 탄탄한 팬덤까지 이미 다 가졌다. 그럼에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후배들을 위해 발언하고, 꿈꾸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노하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들의 어린 시절, 신인 시절에 필요성을 느꼈던 것들이기에 선배가 된 지금 후배에게 손을 내미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렇듯 몸담은 업계와 무대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행동으로 증명하는 박은태와 카이의 행보는 귀감이 되고 있다. 끈질긴 자기관리, 캐릭터와 작품에 끝까지 파고드는 집중력으로 진정성 있는 무대를 만드는 이들의 연기와 노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헛된 꿈속에 날아, 세상의 끝에 내 몸을 던져
‘노비 주제에 입신양명을 꾀한 죄.’
1막 초반 어린 장영실이 통보받는 죄목이다. 이 죄목은 장영실의 일생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복 입은 남자> 주요 인물들의 꿈과 바람에도 적용되는 공식이기도 하다.
노비 출신 장영실은 입신양명을 꿈꿨으며, 여성이자 왕족인 정의공주는 남자 옷을 입고 과학을 공부하며 열의를 보였다. 명나라의 그늘에 짓눌린 작은 나라 조선의 왕 세종은 조선만의 과학, 글자, 역법을 창조하길 꿈꾸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또한 그는 평생 궁에서 살아야 할 신분임에도 극에선 장영실의 비차를 타고 아라비아를 향해 날고 싶단 꿈을 꿨다.
이들이 품었던 원대한 꿈은 오늘날엔 평범한 일상이 됐다. 장영실이 평생을 붙든 비차는 비행기가 돼 하늘을 날고, 세종이 비망록에 쓴 우리 글은 한글이 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돕는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2막 후반 공항 장면에서 ‘장영실의 비차가 여기에 잔뜩 있다’는 내용의 진석 대사를 추가했다. 또한 엔딩에선 조선의 장영실과 대한민국의 진석이 ‘비차’ 리프라이즈 넘버를 함께 부르며 뮤지컬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강조했다.
머나먼 조선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타고 날아온 별은 오늘날 우리 곁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됐다. 그 별은 세종대왕과 장영실, 정의공주처럼 이름 있는 큰 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복과 미령처럼 소박하게 반짝이던 작은 별들 또한 밤하늘을 빛낸다. 이들이 밝혀낸 하늘 아래에 사는 우린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하며 입신양명을 꿈꾸고, 비행기에 올라 하늘을 난다. 그것이 우리가 시간의 위대함이 깃든 별과 밤하늘을 우러러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