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4일부터 7일까지, 국립오페라단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나흘에 걸쳐 무대에 올렸다. 초연 당시부터 ‘공연이 불가능한 작품’이라 불려 온 이 오페라를 전막 형식으로 구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무대는 한국 오페라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기록될 만하다.
트리스탄 역에는 세계 최고의 헬덴 테너로 손꼽히는 스튜어트 스켈톤이, 이졸데 역에는 폭발적인 표현력을 지닌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가 출연했다. 지휘는 《로엔그린》, 《발퀴레》, 《파르지팔》 등을 통해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로 명성을 쌓아온 얍 판 츠베덴이 맡았다. 재단법인 출범 이후 처음으로 오페라 연주에 나선 서울시향은, 여섯 시간에 이르는 극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며 오페라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갖춘 오케스트라임을 증명했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가 완전한 사랑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에 스스로를 내맡긴 작품이다. "
- 연출가 슈테판 메르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흔히 인류 문화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극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의 압도적인 힘은 무엇보다 바그너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격렬한 감정을 음악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는 당시 후원자 오토 베젠동크의 아내 마틸데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있었고, 남녀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오래된 모티프를 자신의 내면적 체험과 결합해 철학적·존재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바그너는 이 오페라를 구상하며 리스트에게 이렇게 썼다. “이 오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랑이 완전히 충족되는 모습을 그리고 싶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뜨겁게 피 흐르는 음악적 개념이다.” 이 문장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사랑이다. 트리스탄은 콘월의 왕 마르케의 조카이자 후계자이고, 이졸데는 마르케의 신부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은 사랑의 묘약을 마시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비극적 운명으로 들어선다.
<이 빛, 그것이 내 생명의 빛일지라도 나는 그것을 주저 없이 꺼버리겠어!> 현실에서 허락되지 않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현실 자체를 벗어나는 방식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생을 붙드는 빛마저 꺼버릴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인 사랑의 힘은 두 연인으로 하여금 사회적·도덕적 규범을 넘어 생명이라는 궁극의 한계까지 초월하게 한다. 트리스탄은 자신의 상처를 찢고, 이졸데는 그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 바로 그 죽음의 문턱에서 역설적으로 자유는 모습을 드러낸다. <야호, 내 피야! 이제 기쁨 속에서 흘러라! … 세상이여, 사라져라!> 절대적 사랑의 순간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닌 해방이 되고, 세계는 허물어진다. 모든 경계의 초월, 의지의 해방, 궁극적 자유가 일치하는 이 절대적 사랑의 세계를 바그너는 ‘무한’이라 표현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순간은 이 ‘무한’을 품고 있다. 1막 전주곡의 시작이자, 반음계로 진행하는 그 유명한 ‘트리스탄 코드’다. 전통적인 서양 음악에서 불협화음은 해소를 전제로 존재했지만, 이 코드는 끝내 하나의 조성으로 귀결되지 않은 채 부유한다. 이 끝없는 상태는 극복해야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음악의 본질이 된다. 1막에서 두 연인이 사랑의 묘약을 마시는 장면부터 2막에서 밤을 찬미하는 이중창, 3막에서 이졸데가 부르는 ‘사랑의 죽음(Liebestod)’에 이르기까지, 이 선율은 사랑의 찰나에서 반복되고 변주된다.

연출자 슈테판 메르키는 이 '끝없음'을 우주 공간으로 치환했다. 1막의 무대는 하나의 우주선의 형상으로 제시되고, 2막과 3막으로 갈수록 거울과 조명이 더해지며 무대는 점차 별들이 떠오르는 우주로 확장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영상 배경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메르키가 이러한 운동을 '구원과 해방을 향한 끝없는 움직임'라 말했듯, 무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동하고 있다는 감각이 집요하게 각인된다. 빛은 소나기가 지나가듯 쏟아지고, 무대 뒤의 비치는 물체(행성)는 처음에는 거대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작아져, 막의 끝에서는 하나의 점이 되어버린다.
무대 중앙의 나선형 구조물은 작품을 관통하는 두 세계, 곧 낮과 밤, 현실과 또 다른 차원의 경계를 상징적으로 허문다. 도덕과 규범, 왕에 대한 충성과 명예가 지배하는 ‘낮의 세계’와 감각적 사랑과 욕망, 죽음과 도취, 무한이 공존하는 ‘밤의 세계’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게 낮은 깨어나야 할 허상이며, 밤만이 진정한 세계다. 이들은 낮의 질서를 등지고 영원한 밤을 찬미한다. <낮보다 죽음이 먼저 왔으면!>, <내려오라,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게 해 다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낮은 필연적으로 되돌아온다.
이름도 없이, 이별도 없이
새로이 깨닫고, 새로이 타오르며
끝없이 영원한 합일된 의식 속에서
가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최고의 사랑의 환희!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반복해서 죽음을 호출한다. 바타유가 말했듯,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연속적인 존재이며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 사랑은 그 간극을 무너뜨리고 연속성에 닿으려는 근원적 충동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 충동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두 연인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비로소 사랑을 완성한다. <이제 나는 트리스탄이 아니에요.>, <이제 나는 이졸데가 아니에요.>, <이름도 없이, 이별도 없이… 끝없이 영원한 합일된 의식 속에서!> 개체화된 자아가 붕괴하고 ‘나’와 ‘너’가 사라지는 절대적 합일의 순간, 이들은 의지의 해방이자 궁극의 자유, 즉 바그너가 말한 '무한'에 이른다. 이졸데가 죽은 트리스탄의 영혼을 따라가며 부르는 ‘사랑의 죽음(Liebestod)’은 육체의 종말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해방의 노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경계를 허물고, 자기 소멸의 지점까지 나아가서야 비로소 도달하는 자유. 인간 존재가 꿈꾸는 가장 극단적인 자유의 형식을 이 노래는 그 끝없는 선율로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