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삶의 허무를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 눈물로 가득한 이 인생,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 그냥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하는 결말이니까.
그런데 가끔은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이 삶을 향한 찬미일 때도 있는 법이다.
참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 얼마 전 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제74회 워크샵으로 공연된 연극 『사의 찬미』는 희곡 『난파』가 떠오르기에 충분했다.

1926년 8월 4일, 유명 작가와 여가수가 현해탄에서 실종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연락선 위에서 젊은 남녀가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한 듯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근대극의 선구자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들과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들이 이어진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동반자살했다느니, 죽음을 계획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느니, 사실 죽은 것이 아니고 어딘가로 도피했다느니. 실제로 당대에 거대한 반향을 일으킨 이 사건은 윤심덕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노래 『사의 찬미』의 제목을 따서 연극과 영화, 드라마 등으로 계속 창작되어왔다.
김우진의 희곡 『난파』의 결말에서는 주인공이 바다에 빠져버리고,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는 죽음의 노래라는 점에서, 이 예술가들의 실종은 마치 사랑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해버린 낭만적 허무로 많이 재해석된다.

그러나 정말 그들의 결말은 ‘포기’로만 해석되는가? 희곡 『난파』를 바탕으로, 연극 『사의 찬미』 속 김우진과 윤심덕의 동반자살을 바라보자.
김우진의 『난파』는 3막으로 된 표현주의극(Ein __EXPRESSION__istische Spiel in drei Akten)이다. 표현주의는 인습적 형식을 모두 해체하고 강렬한 주관성과 극단적인 심리를 강조하여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드러내는 문학 사조로, 특히 과거의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부조리한 기존질서를 파괴하여 가치 개념의 재정립과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를 지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표현주의극인 『난파』의 줄거리 또한, 기존의 질서 파괴 - 새로운 질서 창조라는 구조를 적용시킬 수 있게 된다.
『난파』에서는 엄격한 유교식 가족구조에서 아버지로부터 가문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강요를 받은 젊은 시인이 자신의 자유와 이상추구를 위해 갈등하고 저항하다가 결국은 어머니가 있는 바다로의 난파를 택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어떤 인물은 전통과 가업을, 어떤 인물은 정열적 사랑을, 또 어떤 인물은 근대적 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과 싸워나가는 주인공 시인은 이 희곡의 작가 김우진을 연상케 한다. 이들에 쫓기다가 결국 바다로 난파한다는 결말은 종종 ‘포기’, ’선택 회피’, 또는 ‘현실 안주’로 해석된다. 어느 가치를 택할 수 없어 선택을 포기하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주의 작품은 세계를 거부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에 더 나아가 ‘새로운 내면적 질서의 창조’로 마무리되어야만 한다. 『난파』의 기본 골조를 구성하는 이 표현주의적 구조에 따르면, 난파는 절대 생에 대한 포기로 해석될 수 없다. 시인은 여러 인물들이 제시한 가치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였던 것이 아니라, 그 가치들을 하나하나 거부해 가며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3막에서 시인이 어린아이처럼 발가벗고 어머니의 품에 결국 귀의하는 난파 장면이 재현됨으로써, 시인의 정신은 창조적인 아이의 정신 단계로 변화한다. 논문에 따르면(주현식, 2009), ‘여기서 어린아이는 무거운 고통의 짐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순진 무구를 갖추었으며, 그러한 까닭으로 그들은 스스로가 사건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 존재의 우연성을 긍정하게 되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난파한 조각나무의 이미지에는 파편이라는 무효화의 의미보다는 니체가 사용하는 항해자와 조각배라는 긍정적 메타포가 더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에서 비롯된 창조를 가능케 하는 곳이 바로 ‘원점’을 상징하는 어머니이자 물로 가득한, 바다라는 공간이다.
시인이 마침내 지향하게 된 가치는 유교주의적 도덕 의무와 같은 현실 초월적 관념론도 아니며, 쾌락이나 낭만, 정열이나 이성, 자유와 같은 것도 아니다. 즉, 물결 위의 하늘도 아니며, 물결 아래 심연도 아니다. 그보다는 난파한 조각나무가 물결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단지 표면만을 항해하듯이, 수면을 맴도는 연기와도 같은 현재이다.
결국 김우진이 기존의 질서와 세계들을 파괴하고 마지막으로 도달한 결론은 새로운 내면의 창조였다. 어떻게 난파가 단순한 허무의 표현이 될 수 있겠는가?

(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제74회 워크샵 『사의 찬미』 공연 사진. 출처: 공식 인스타그램)
이러한 난파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연극 『사의 찬미』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면, 김우진과 윤심덕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결말 또한 생이 아예 무의미하기 때문은 아닐 것 같았다. 무대 위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바다는 정념의 끝에서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공간이라기보다, 오래도록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세계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건너가야 하는 경계처럼 보였다. 절망스러운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하나씩 떼어내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도달하게 되는 어떤 원점의 형태로.
윤심덕 가요.
김우진 가자, 우리의 바다로.
이번 고대극회 『사의 찬미』가 보여주는 바다의 이미지가 더욱 그러했다.
뱃머리 모양의 단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극은, 김우진과 윤심덕의 죽음이라는 예정된 결말로 흘러가는 일종의 항해처럼 보였다. 생이랑 비슷하지 않은가. 배우들에게는 오로지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지며 관객은 그들과 함께 지난한 삶의 장막들을 헤쳐 죽음이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시성이,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김우진과 윤심덕의 생의 순간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특히 윤심덕 역을 맡은 이은서 배우의 연기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아 이 항해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내게 목소리로만 존재했던 윤심덕은 이제 이은서 배우의 얼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애틋했다. 김우진 역의 전진욱 배우는 차갑고 건조한 말투 아래, 『난파』를 읽을 당시 느꼈던 김우진의 불안정하고 요동치는 내면을 묻어둔 듯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관객은 홍난파, 조명희, 요시다가 훌륭하게 마련한 회상의 항로를 따라 이들의 생을 동시에 걷게 된다. 그래서일까? 삶을 겪으니 아무리 허무함을 노래해도 허무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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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 곧 허무와 포기가 되려면 자살 이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생을 종결한다는 그것만으로 결심해야 한다. 그러나 김우진과 윤심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 그들이 통감한 사회와 인습의 가치들을 거부하고, 그들은 그들의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난파했다. 그래서 그들의 바다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공간이 아니었다.
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것이 결국은 생에 대한 찬미일지도 모른다. 허무를 이야기하면서도 허무가 비어 있지 않았던 이유는, 관객이 무대 위의 시간을, 그들의 삶을, 함께 통과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순간에 압축된 생의 총량이 영원으로 변환되는 바다를 향해.
오랜만에 『난파』를 떠올리게 만들어 준 이 무대에 감사했다. 『사의 찬미』를 사랑하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무대에 올라 준 친구, 김형준 배우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