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색 트윈테일에 높은 기계음. 보컬로이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하츠네 미쿠의 이미지이다.
미쿠라는 캐릭터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만, 보컬로이드 음악이 시작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한국에서는 팬층을 제외하고는 흔히 ‘듣기 힘든’ 노래로 진입장벽이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한국 내 보컬로이드 장르는 ‘오타쿠’, 즉 덕후들의 서브컬쳐로 존재해왔고, 주류에서 벗어난 장르이기에 숨어서 조용히 좋아해야 하는 (오로지 온라인 상에서만 활발할 수 있는) 팬들이 정말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같이 서브컬쳐 장르를 즐기는 것이 일종의 힙함으로 여겨지고, 이러한 문화가 ‘메이저’ 취급을 받기 시작함에 따라 보컬로이드도 크게 주목받는 것만 같다.
지난 11월 29-30일,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에서 개최된 미쿠의 최초 내한 콘서트 미쿠 엑스포(HATSUNE MIKU EXPO 2025 in Seoul)는 9,463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SNS에는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쉬움으로 가득할 정도였고, 의류브랜드 SPAO와의 콜라보 상품은 전체가 품절되어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리셀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돌 예나(YENA)는 일본 디지털 싱글에서 미쿠와 콜라보한 것으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컬로이드, 줄여서 보카로라고 부르는 이 장르는 일본의 제작사 야마하에서 개발한 음성 합성 엔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데이터화한 후 이를 배포하면 누구나 합성 엔진과 에디터를 활용하여 해당 목소리로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것. 처음에는 일종의 가상악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목소리에 이미지와 설정을 붙여 캐릭터성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하츠네 미쿠가 탄생했다. 그 이후 큰 인기를 이어 나가며 카가미네 린/렌이나 메구리네 루카 등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음성 합성 엔진, 즉 보컬로이드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미쿠는 이쯤에서 단순히 목소리를 녹음한 소프트웨어 캐릭터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서브컬쳐 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세계의 공주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계기는 노래 [Melt]에 있다.
2007년에 투고된 [Melt]는 프로듀서 ryo가 미쿠를 활용해 작곡한 노래로, 가사 자체가 보컬로이드 자신에 관한 내용이 많았던 초기 곡들과 다르게 다양한 내용과 멜로디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폭발적으로 흥행하게 되었다. [Melt]가 기존 보컬로이드 곡들의 틀을 깨고 얻어낸 인기를 시작으로, 창작자들은 따로 보컬을 구할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 어떤 곡이든 만들 수 있는 목소리를 얻었다. 더이상 가수를 위한 노래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에 따라 수많은 곡들이 빠르게 작곡되었고, 이를 직접 불러 투고하는 사람들인 ‘우타이테’들도 늘어나면서 당시 일본의 영상 플랫폼 ‘니코니코 동화’의 인기 영상 순위는 보컬로이드가 오랫동안 점령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를 즐기는 팬덤층과 다시 그림, 글 등으로 재창작을 하는 사람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창작층과 소비층이 뒤섞여 모두 급속도로 확장된 보컬로이드 시장은 모두 [Melt]가 불러일으킨 것이고, 그래서 전 세계 서브컬쳐가 맞은 이 거대한 전환점을 멜트 쇼크라는 이름으로까지 부른다.
이 멜트 쇼크로부터 현재 우리가 아는 J-POP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J-POP을 이끄는 대표 싱어송라이터 요네즈 켄시, 요루시카(프로듀서 나부나), 요아소비(프로듀서 아야세), eve 등은 모두 보컬로이드를 통해 노래를 작곡하던 보카로P(프로듀서) 출신이다. 차트를 휩쓰는 인기 가수 Ado, 바운디 등은 보컬로이드의 노래를 커버하던 ‘우타이테’ 출신. 누구나 원하는 대로 곡을 만들고 누구나 불러 투고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독창적인 스타일의 아티스트들이 마음껏 성장하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 인해, J-POP 음악 자체의 작곡, 작사 방식에도 새로운 물결이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유독 J-POP에는 빠른 BPM에 타이트한 가사를 빼곡히 채우고 초고음역대를 넘나드는 형식의 노래가 많은데, 이것은 보컬로이드 곡들의 경향성을 그대로 가져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이렇게 한 곡 내에서 변주를 거듭하며 ‘보컬로이드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다 보니 많은 가사의 양을 채워야만 했고, 창작자가 넣고 싶은 내용이면 무엇이든 집어 넣는 자전적이고 솔직한 가사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현재 J-POP 음악들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특징이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발달한 하위 문화가 주류 대중문화를 형성했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주류에서 하위가 파생되는 방향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마이너한 서브컬쳐 장르들이 소위 ‘양지’로 올라온다며 기존 팬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보컬로이드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IP의 수명을 지속하는 일에 있어서 새로운 팬층의 유입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특히나 보컬로이드는 이미 약 20년의 역사를 이어 왔으나 새로운 스토리나 시즌이 나올 수 없는 데다가 완결 또한 날 수 없는 장르. 그렇기 때문에 곡을 만들고, 부르고, 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나야 한다. 그래야, 이번 엑스포에서 곧 다시 만나자고 한 미쿠의 말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쿠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잊히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로부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려면, 계속해서 새로운 지평선을 향할 수밖에 없다. 다시 내일을 향해서 가는 초계반을 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