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우연히 인스타그램 피드에 어떤 사람이 쓴 후기가 떴는데, 나는 그 사람이 왜 재밌게 봤는지보다 이 작품의 제목 자체에 꽂혀 버렸다. 아침에 먹는 사과도 아니고, 밤에 먹는 무화과라니. 왜 이 제목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예매 버튼을 눌렀고, 국립정동극장 세실로 향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무화과를 내어줄지 기대하면서.

이 작품은 70대 미혼 여성인 '윤숙'이 뤽상부르 호텔에 머물면서, 로비에 앉아 소설을 쓰다 호텔을 찾은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이야기이다. 호텔 직원과 청소부부터, 출장 온 교포 남자, 호텔 근처 교회 교인, 싱글 웨딩 사진을 찍으러 온 여성들까지. 이들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윤숙에 대해 처음에는 당황해하기도 하지만, 대화를 나누며 점차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무른 면까지 보여준다. 다 보고 나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생 무화과 같은 극이다. 향과 맛이 강하지 않다. 그저 슴슴하고 은은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계속 먹게 되는 맛이었다.
나는 헷갈렸다. 작품은 나에게 큰 웃음을 주지도, 큰 감동을 주지도 않았다.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왜 나는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걸까? 내가 이걸 돈 주고 보러 와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연극을 보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서 그런가? 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알 수 없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이 참 그 이름다웠다.
나는 찾고 싶었다. 와닿지 않았는데 무대를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리고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를. 그래서 극장에서 나와 근처의 무화과 디저트를 판다는 카페에 갔다. 작품에 나온 인물들처럼 나도 무화과를 먹는다면 이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기대 때문이었다.

무화과 휘낭시에를 먹었다. (밤에 먹는 무화과를 보고 밤에 먹는 무화과라며 혼자 피식거리면서.) 근데 생과가 아니라 반건조 된 걸 먹어서 그런가, 먹으며 프로그램 북을 읽어봐도 이 작품이 도통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작가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호텔은 유령이 나오기 좋은 공간입니다.
... 유령이 유령이 아니게 되는 순간은 누군가 유령의 이름을 불러줄 때입니다.
... 오래도록 호명되지 않았던 사람이 우리를 먼저 부르고 초대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도 그를 초대할 수 있을까요? 초대한다면 환대할 수 있을까요?"
극을 다 봤음에도 이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극 내향인인 나는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행위를 매우 어색해 한다. 그래서인지 낯선 이에게 말 걸기를 반복하는 윤숙의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윤숙이 직원을 귀찮게 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저 진상 짓이 그냥 싫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호명되지 않았던 사람이 나를 초대할 때 다정히 응답하겠노라고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응답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왜 다들 좋다고 하는 극을 나만 좋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답답했다. 내가 이 극에서 대체 무엇을 얻어야만 했을까. 그걸 알기 위해 원래 같았다면 재관람을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본 공연이 세미 막공이었기 때문에 일정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밤에 먹는 무화과>가 수록된 희곡집 <여자는 울지 않는다>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서 이 작품을 텍스트로 다시 한번 만나보았다.
아..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희곡을 읽기 전과 후의 감상에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 작품을 이해하는 걸 포기하자고 생각했고, 무화과는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근데 그러던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한 만화를 보게 된다. '사메' 작가님의 만화였다.


출처 : 인스타그램 @samemanga
해당 만화는 원작자의 허가를 받고 인용했습니다.
이 만화를 보니 순간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동시에 갑자기 어디선가 들어본 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리고 <밤에 먹는 무화과>가 생각났다.
이러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린 다 꽃이었어. 붓꽃이라고 호명된 이 만화의 화자와, 소국꽃이라고 호명된 앞 집 할머니처럼. 그런데 꽃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거야. 그 시 구절처럼.
누군가 유령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더 이상 유령이 아니게 된다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 아닐까. 그러니 이름을 불러주고, 서로를 알아봐 주는 게 중요한 거다. 그게 상대를 비로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유령 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조그마한 관심과 존중일지라도 그게 한 사람의 존재와 가치를 빛나게 하는 것이구나.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열매가 꽃 그 자체이다. 즉 무화과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닌 것 같아도 모두가 사실은 다 꽃 같은 존재다. 윤숙과,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 전부 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비로소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그 은은한 온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후 희곡을 다시 읽고, 작품을 다시 뜯어보았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 작품의 의문스러웠던 영문명 "At Night, Nobody's Hotel"부터. 밤에 아무도 호텔에 없다는 것은, 등장인물 모두가 사실 유령 같은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이란 한 곳에 영원히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이리저리 떠돌다 어딘가에 잠시 머물고 이내 떠나가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호텔 로비'라는 배경으로 그러한 특성을 선명하게 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작품은 왜 한글 명도, 영문명도 '밤'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밤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시간이다. 어린아이의 키가 크고, 낮에 가라앉아 있던 생각들도 둥둥 떠오른다. 그러니 공중에 떠다니는 유령들이 활동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작품은 또 한 번 밤이라는 요소를 통해 우리 모두가 유령 같은 존재임을 강조하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호명해 주어야 한다고 속삭였던 것이었다.
70대 미혼 여성인 윤숙은 누구보다도 유령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자신을 알거나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그저 스쳐 지나가기에 윤숙에게 그 사람들 또한 모두 유령과도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파티에 유령까지도 초대하기로 한다. (그녀의 말을 거는 행위는 '자신의 파티에 초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윤숙이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 즉 말을 걸며 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깊은 관계가 결여된 삶 속에서 외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을 스쳐가는 사람들을 다정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윤숙은 말을 걸 때 대뜸 냅다 그러지 않는다. 상대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때쯤의 타이밍에 말을 건다. 희곡에서도 말을 걸기 전 '(충분히 망설이다가)'라는 지문이 적혀 있다. 이렇듯 윤숙은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초대장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희곡의 마지막 장에서 윤숙은 소설에 이러한 내용을 쓴다.
여자의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모두를 불렀고 모두가 배불리 먹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자는 대뜸 아무에게나 묻고 싶어졌다.
너희를 부르는 데에 성공한, 이런 나를 뭐라고 부를 테냐고.
밤을 먼저 깨달은 나를, 새까만 허공 속에 감춰진 비밀들을 알아챈 나를......
뭐라고 하든 좋으니 불러보라고. 이젠 나를 초대하라고.
나 또한 초대받고 싶다고.
무도회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마음이 여자에게는 있었다.
나는 (앞서 언급했듯) 극 내향형 성격이고, 낯선 사람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작품을 통해 내가 윤숙 같은 존재에게 먼저 초대장을 내밀 줄 아는 다정함과 용기를 얻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그런 존재가 나를 초대하려고 한다면, 그 초대장을 정중히 받고 파티에 참여할 줄 아는 사람 정도는 되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 사람의 이름을 기꺼이 불러주고, 그가 어떤 꽃인지 궁금해할 줄 아는 여유를 가져보고 싶은 마음 정도는 준 것 같다.
누군가는 한 번에 깨달았을 이 작품의 메시지를 이렇게 빙빙 돌고 돌아서야 알게 된 과정을 적고 나니 속이 후련하고도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나에게 한 번에 와닿지 않은 이유는 낯선 이와의 대화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못 한 채 극에 나를 투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공연을 좋아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한 번에 도통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이 종종 있다. (사실 많다) 앞으로 그러한 작품들이 있을 때마다 매번 이 정도로 기를 써서 이해하려 들려고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밤에 먹는 무화과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미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여정은 꽤 괜찮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