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사실 난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마리아의 이야기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닌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문제의 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의 포스터를 보면 눈에 띄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장면은 대본에 없었다"라는 문구와 무수히 많은 카메라와 기자를 뒤로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난 이 두 가지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대본에 없는 장면은 무엇인지 어째서 마리아는 기자가 아닌 우리를 응시하는지 궁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장면은 대본에 없었다.
영화는 마리아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촬영하던 당시를 재현한다. 그 작품은 마리아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이었지만 동시에 삶 전체를 뒤흔든 비극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문제의 장면은 마리아의 대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동의 없이 강요된 폭력적인 연출,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연기가 아닌 생생한 감정을 원했다”라는 궤변으로 이를 정당화한다. 결국 그 장면은 한 배우의 몸과 마음을 침범하는 폭력이 되었고, 마리아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그 시대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관계 속에서의 강요와 침묵은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과거를 조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침묵 대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분명 달라진 점도 있다. 그 용기들이 모여서 당시 외면당했던 마리아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배우와 배역 사이 지워진 이름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배우'가 아니라 '배역'을 보게 된다. 이번 영화 역시 나는 배우가 아닌 배우가 연기한 마리아 슈나이더라는 인물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배우와 배역을 구분하여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마리아가 "나의 근본(본질)은 잊지 않아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후 마리아에게 붙은 수식어들은 그 본질을 흐리게 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여자의 수치'라는 낙인을 감당해야 했고, 배역의 이미지가 마리아의 삶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럼에도 마리아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있는 장면이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연기가 아닌 그저 편안히 웃는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말한 '근본'이 아닐지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아가 약물에 중독되면서 상황은 나빠졌다. 영화 속에는 약물에 중독되어 자신을 보지 말라며 소리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나온다. 그 순간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는데 마리아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절박함이 화면 밖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그 장면은 단지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본질이 얼마나 쉽게 지워졌는지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
영화는 마리아가 결국 연기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약물 치료를 받기도 하고 마리아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연인 누르를 만나 조금씩 자신을 되찾아간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인터뷰한다. 영화의 마지막, 마리아는 정면을 조용히 응시한 채 화면을 채운다. 수많은 시선에 상처받던 사람이 이제는 오히려 우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나는 그 응시가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되찾으려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 대상이 되어 있던 마리아가 이번에는 오히려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보기 편안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불편함 덕분에 한 사람의 삶, 그 삶을 둘러싼 시선들, 예술과 폭력의 경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