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히에로니무스 보스, 클로드 모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엘 그레코. 이들의 이름은 그 활자만으로도 무감각했던 일상에 영감이 넘쳐흐를 것 같은 예감을 들게 만든다. 그래서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 거장들의 영혼이 담긴 대작을 만나기 위해 직접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건너 긴 여정을 떠나곤 한다.

 

그러니 미세권에 거주하는 사람들, 풀어 말하자면 미술관 근처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막대한 권력을 가진 것인가. 가끔 그들의 행운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할 때면 ‘나중에는 꼭 문화예술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지’하는 마음을 먹곤 한다.

 

그러나 가끔은 그 행운이 직접 찾아올 때도 있는 법이다. 그들을 부러워하며 입맛만 다실 몇몇 한국인들을 위해, 어떤 우연한 기회로, 기묘한 인연으로 과거였으면 그들의 시선에서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타지에 이 거장들이 남긴 유산들이 서울에 발을 디뎠다.

 

이번 행운은 11월 5일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다. 국내 문화콘텐츠기업인 ‘가우디움소시에이츠’와 미국 샌디에이고 미술관과 협업하여 성사된 결과다. 서양 미술사 600년을 아우르는 거장 60명의 작품 65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형 전시인데, 심지어 단 한 번도 해외에서 전시한 바 없던 주요 상설 작품 28점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려 작품 가액만 2조 원을 넘는 규모. 이렇게나 특별한 기회를 놓칠 순 없다는 마음 하나로 서울로 향했다. 당연히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야 훨씬 싼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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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을 맞아주는 건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기둥들과 시야를 압도하는 강렬한 붉은 빛의 공간이었다. 그건 마치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초월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처럼 느껴졌는데, 앞으로 마주하게 될 길고 긴 역사와 이들의 열정, 그리고 신앙을 압축해 놓은 것만 같은 강렬함이었다. 그 뒤로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 예술이 꽃피던 절정의 시대,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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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빛이 돌 정도로 짙은 자주색의 공간 속에서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베르나르디노 루이니, 히에로니무스 보스, 코스메 투라와 같은 작가들이다.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철학을 계승하고, 인본주의가 확산되던 시기였기에 그 공간을 장악한 건 바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특히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리스도의 체포’를 보면 이들의 시선이 얼마나 ‘인간’에게 옮겨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전형화 되어왔던 과거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이들의 상상력 속에서 재구성된 모습, 즉 아주 인간다운 모습으로 마리아와 예수는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다. 단순한 미(美)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대한 또 다른 확신의 시각화였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휩쓴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아름다움. 이 섹션의 작품들은 왜 ‘르네상스’가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나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어째서 문화예술의 ‘황금기’라고 불리는지 충분히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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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금기를 지나 두 번째 섹션인 바로크 섹션에서는 당대를 풍미했던 앤서니 반 다이크,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과 같은 화가들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섹션에서는 인간의 감정에 깊이 이입하고, 그만큼 더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문화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붉은색 속에서 느낀 바로크 작품들은 르네상스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면서도 드라마틱했다.

 

그중에서도 상당히 큰 공간을 차지하는 하위 섹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유달리 높은 층고와 위에서 아래로 내리쬐는 조명, 그 밑에서 각각의 방향으로 위를 우러러보는 네 인물을 담은 네 점의 그림은 하나의 연작으로 보일 만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중에는 엘 그레코의 작품, ‘참회하는 성 베드로’도 있었다.

 

각 액자 속에 담긴 인물들은 저마다 참회하거나 경외하며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 담긴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쓰인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이해하고 나니 그림에 담긴 이야기가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르네상스 예술과 다르게 사실적으로 표현된 주변 풍경의 묘사도 여겨볼 만한 특징 중 하나였다.

 

이 공간에서는 한참을 네 점의 작품이 한눈에 잘 보이는 원거리에서 서 있었다. 네 인물의 시선이 소실점처럼 하나로 맞물리는 것을 포착했을 때의 짜릿함,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캔버스 위로 붓을 그어나갈 때 화가들이 느꼈을 어떤 열정과 신앙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열심히 저울질했다. 나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어떤 시대에 더 살고 싶은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상상하다 보니 이해하기 어려울 것만 같던 고전 미술을 감상하면서도 나름대로 취향이 생기는 기분이어서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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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바로크를 지나 맞이하는 시대는 바로크에 세심함을 더한 로코코와 신고전주의의 시대다. 이 섹션에서는 루이 15세의 시대 속에서 종교적 신앙보다 상업에 눈을 뜬 화가들이 포착한 풍경들이 줄지어 있었다. 앞선 바로크 작품들의 특징이 강렬한 대비라면, 이 로코코 시대 작품의 특징은 섬세하면서도 우아하게 드러나는 귀족적인 분위기다.

 

그래서 짙은 초록빛 벽 위로 등장하는 작품들의 색채는 바로크보다 훨씬 옅어져 있었는데, 옅다고 하여 화려함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섬세한 색 조합에서 오는 부드러움과 은은한 권위는 그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향락과 사치의 시대답게 파티를 즐기는 귀족들의 모습이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앞서 모든 이들이 부르짖던 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어버린 신의 자리를 차지한 건, 인간 내면의 심리와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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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감상한 작품은 안토니오 카날레토의 조카인 베르나르도 벨로토가 그린 베네치아의 풍경이었다. 색감은 필름 카메라인데, 디테일은 캐논 DSLR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을 샅샅이 뜯어보는 내내 감탄을 멈출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림에 담긴 생생하게 살아있는 붓터치의 질감 하나만으로도 원화 전시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로코코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절제되고 강렬한 대비 뒤 등장하는 화려함은 그 당시 귀족뿐만 아니라 나까지 현혹한 게 분명했다. 로코코 그림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드레스, 장신구, 연회의 장면은 사치에서 오는 만족감을 주었다. 그 이면에 어두움이 만연할지라도, 역시 로코코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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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의 화려함, 신고전주의의 균형감을 뒤로하고 다음 섹션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공간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앞선 섹션의 우아함과 낭만은 사라지고, 대신 무언가 갈등하고 흔들리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벽의 색도, 조명도, 작품들의 주제도 급격히 변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 그것이 미술의 세계에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로코코의 귀족적 우아함을 누렸던 시대는 끝났고, 신고전주의를 지나자, 예술은 귀족이 아니라 점점 평민들과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화가들이 선택한 것은 귀족의 얼굴이 아니라 거리와 노동자, 일상의 평범함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크게 두 형상으로 나타났다. 지극히 사실적이거나, 지극히 인상적이거나. 이번 전시에서는 전자의 경우를 귀스타프 쿠르베의 ‘풍경’으로, 후자의 경우를 클로드 모네의 ‘샤이의 건초더미들’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모네의 '샤이의 건초더미들'은 인상주의 관점의 정점이었다. 건초더미라는 평범한 소재. 그것을 보면 '아, 농촌의 풍경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그림 앞에 서면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건초더미가 아니라 빛의 교향곡이다. 시간에 따라 때로는 분홍색으로, 때로는 보라색으로, 때로는 금색으로 물드는 그 건초더미를 보고 있노라면, 관람객은 비로소 인상주의 화가가 왜 같은 소재를 수십 번이나 반복해 그렸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그림들 앞에서는 마치 관찰자가 아니라 몰래 누군가를 훔쳐보는 자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정면이 아닌 각도에서, 무작위로 잘린 화면 속에서 포착된 그들의 동작. 마치 카메라가 찰칵 눌러지는 순간을 그려낸 것 같은 구도. 고전 회화의 웅장함과 완성도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화가들이 발견한 건, 일상 속의 진정성이었다.

 

로코코의 사치에 현혹되었던 나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감정을 맞닥뜨렸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직함에 끌린 것이다. 거리 빈민의 얼굴에서, 무용수의 피곤한 어깨에서, 같은 건초더미를 수십 번이나 그려낸 화가의 집착에서. 그것이 현대에 우리를 호출하는 이유는, 그 안에 권력과 기교, 계산된 화려함이 아니라 순수한 응시가 있고, 그것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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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흐름 속에서는 온전한 자유를 찾아가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고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내비치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막시밀리앙 뤼스의 점묘화, 마리 로랑생의 ‘니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푸른 눈의 소년’이 그러했다.

 

더 이상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닌 예술은 그렇게 제각기 빛나고 있었다. 관습에서 탈피하고 수많은 도전을 거치며 개성이란 말에 걸맞게 개개인으로 수렴하는 이 현상은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바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몇 분을 바라보고 있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도, 눈에 넘치도록 아름다운 그림도 공존한다는 가치 아래에서 빛을 받고 있었다.

 

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이 모더니즘이 만든 흐름 덕분이 아닐지 생각해봤다. 귀족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르네상스, 바로크를 거쳐 인상주의, 모더니즘의 시대가 오기까지, 세계의 벽이 낮아지고 신분제가 약화하는 과정에서 예술이 홀로 고고히 그 콧대를 세우고 있었다면 아마 이런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대중의 삶과 더 가까워지는 길을 택했고, 또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이 공간에 자리한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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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걸려 있던 호아킨 소로야의 ‘라 그랑하의 마리아’와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양치기 소녀’는 길이길이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귀족 여성의 우아함과 시골 소녀의 소박함, 세밀함과 거친 붓질이 만드는 대비감 속에서 관람객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모더니즘의 시대가 와도, 또 개성과 자유가 예술을 지배해도, 여전히 화가들은 자신이 보고 사랑한 대상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는 것을. 그 변하지 않는 열정이 길이 기억에 남았다.

 

600년을 압축해 놓은 이 공간을 빠져나오는 동안 들었던 생각은 ‘대체 얼마나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걸까’ 싶은 경이로움과 그에 대한 존경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화가와 그들의 걸작, 그것들이 한데 모여 내는 아우라는 정말 아름다웠다.

 

어쩌다 우연한 계기로, 어찌 보면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기꺼이 비행깃값을 내고 날아가 이 그림들을 샌디에이고 미술관에서 직접 마주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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