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양 미술사의 거대한 흐름을 한자리에서 체감할 수 있는 전시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을 다녀왔다.
사실 나는 미술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매체이자 냄새도 소리도 없는 시각 정보만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회화 작품 앞에서 전율을 경험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미술의 매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곤 한다.
나에게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고요한 작품 감상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일상을 잠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산책하듯 바라보는 경험에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전미술보다는 동시대성·맥락·오브제에 대한 의미부여가 중요한 현대미술이나 설치미술에 더 끌리는 편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 상류층의 취향과 권력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동적인 세계를 영원히 고정하는 매체로서 기능했던 고전 회화의 가치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유럽의 거대한 미술관을 여행할 때조차 ‘고전예술은 다소 지루하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인파, 끝이 보이지 않는 전시장, 위아래로 걸린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 감상하기도 전에 기가 빨리는 규모감 앞에서 압도되었고, 그래서 다빈치의 <모나리자>든 클림트의 <키스>든 내게는 감흥이 크지 않았다. 결국 내게 그림이라는 것은 작품 단독의 경험이 아니라, 공간·기획·동선까지 포함한 복합적 체험으로서 의미가 더 컸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선택한 이유는 샌디에이고 미술관 개관 이후 100년 동안 한 번도 해외 반출된 적 없던 상설 컬렉션 25점이 최초로 한국에 공개된다는 점,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대표작들을 한국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이례적 기회라는 점에 있다. 대부분의 명화가 한국에서는 일시적 기획전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기에, 바로 그 기획 전시의 특별함과 일시성이 고전 회화에 대한 접근성을 오히려 높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세종미술관을 처음 방문했는데, 내부 시설이 깔끔하고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아 접근성이 좋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 가액만 총 2조 원을 상회하는 대규모 전시라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주가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나처럼 미술에 익숙지 않은 관람객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전시였다. 교과서 속 그림들이 눈앞에 실재한다는 경험만으로도 좋다. 작가 이름을 살펴보며 어디서 들어본 듯한 친숙함을 느끼고, 화풍과 시대적 맥락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600년의 서양미술사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큐레이션과 작품 설명도 충실했다. 도슨트와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한다면 더 깊고 풍부한 감상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일행과 함께 방문해 자유 관람을 택했다.
나는 솔직히 바로크와 로코코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 배경을 알고 그 시대의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관람하니 특징을 알 것도 같았다. 그 다음 그림이 달라 보였다. 정적인 이미지 너머에 동적 세계가 거울처럼 반사되는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믿었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일부 섹션에서는 음악이 더해져 몰입감을 높였다. 구역별로 비슷한 화풍을 연속적으로 보다 보니 작은 차이가 눈에 들어왔고, 그 속에서 나의 취향도 조금씩 도드라졌다. 흥미로웠던 점은 각 시대마다 서로 대비되는 두 화풍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역시 어디에나 주류에 균열을 내고 싶은 욕망은 존재하는 듯하다.
전시는 총 1부에서 5부로 구성된다.
1부는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의 14명의 거장 작품을 소개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화심’은 최근 연구 발표 전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분류되었다고 하는데, 단지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작품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여성 화가 소프니소바 앙귀솔라의 작품은 당시 드문 여성 작가라는 점은 물론, 어디선가 묘하게 자신만의 시선이 느껴지는 스타일이 인상 깊었다.
2부는 바로크 시대를 담은 스페인 거장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천 하나의 구김, 빛의 각도, 그림자의 농도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작품들 앞에서 ‘유화임에도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3부는 로코코시대부터 계몽주의까지를 다루고 있다. 화려함과 우아함이라는 시대적 취향이 색감과 분위기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라 로카 공작 비센테 마리아 데 베라 데 아라곤의 초상’은 청각장애를 앓았던 고야가 정적인 그림을 통해 말하는 몸짓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4부는 모네와 드가의 작품을 포함해 익숙하고 사랑받는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구간을 지나며 '아, 내 취향이 인상주의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네치아를 그린 작품이 유독 많아 이 도시가 화가들에게 얼마나 큰 영감을 남겼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중 이상화된 풍경이 아닌 현실의 베네치아를 담아낸 작품이 특히 강렬하게 남았다.
5부는 후기 인상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의 작품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이 섹션에서는 메리 카시트의 부드러운 수채화 색감으로 그려진 유아의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난해하고 설명이 필요한 회화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 위한 회화가 아니라, 각자가 보는 세계를 자신만의 인상으로 표현해낸 작품들이기에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고 세련됨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전시를 관람하면서 마치 현장에서 서양미술사 교양을 배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친절한 설명과 기획, 깔끔한 공간 구성 덕분에 가족·연인·혼자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전시다.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은 2026년 2월 2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