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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파키스탄 출신 주인공 찬게즈가 미국 사회에서 우수한 인재로 인정 받으며 살아가다, 911 테러 이후 자신의 인종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소설은 파키스탄에 여행 온 관광객에게 찬게즈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독자는 찬게즈가 결국 미국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돌아갔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무의식 속에서 꿈틀대는 찬게즈의 타자적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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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청년 찬게즈는 우수한 성적으로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언더우드샘슨이라는 미국 최고의 재정평가 회사에 취직한다. 이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 받은 찬게즈는 넉넉한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거머쥐며 스스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찬게즈가 자신의 무의식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911 테러 이전부터 드러난다. 찬게즈는 필리핀에 출장을 갔을 때 도로에서 필리핀 운전사 중 한 명이 차창 너머로 자신을 적개심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봤다는 이야기를 한다. 운전사의 험악한 표정은 교통 체증 때문에 기분이 예민해졌거나, 혹은 찬게즈와는 무관한 사사로운 이유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찬게즈는 필리핀 운전사의 표정을 무의식 중에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모든 게 무의식적으로, 그와 내가 일종의 제3세계적인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더군요. 그런데 내 동료 중 하나가 나한테 뭔가를 물었어요. 내가 그에게 대답을 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나는 그-금발에 옅은 색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부적인 일에 몰두하는 표정-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너는 정말로 이국적이구나. 나는 그 순간, 내가 그보다 필리핀 운전사와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거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집에 가야 하는데,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p.62)’

 

 

이처럼 찬게즈는 이미 911 테러 이전에도 일상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적 정체성이 꿈틀대는 느낌을 경험하고, 천천히 자신의 타자적 정체성을 인지하게 된다.

 

 

 

911 테러로 마주한 타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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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갔던 필리핀에서 찬게즈는 TV를 통해 911 테러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테러 소식을 접했다는 그의 반응이 조금 오싹하다.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p.66)’

 

 

찬게즈의 이러한 반응은 희생자를 향한 것이라기보단 미국을 상징하는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진 것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찬게즈는 표면적으로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명 기업에 입사하는 등 미국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완전한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이민자 출신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늘 긴장하며 살아가던 찬게즈의 타자적 정체성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이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몰락에 대한 옅은 쾌감으로 드러난 것이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국가에 대한 국제적 인식은 악화됐고, 미국에선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이 묻지마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찬게즈는 이러한 이민자 혐오 문제들로부터 자신을 거리둔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대부분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이라는 근거가 있는 몇 안 되는 이야기들을 과장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발생한 그런 일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았어요.(p.86)’

 

 

그러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하고, 찬게즈의 고향인 파키스탄도 전쟁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게 되자 찬게즈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타자화시키고 싶었던 정체성의 문제가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 채널을 돌리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미군이 탈레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밤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내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어요.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의 이웃이자 우리의 친구였어요. 게다가 같은 이슬람 국가였어요.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침략하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나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어요.(p.90)’

 



찬게즈와 에리카, 찬게즈와 미국(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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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 찬게즈의 서사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 에리카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찬게즈는 프린스턴 졸업생 사교클럽에서 에리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에리카(Erica)’는 미국, 즉 ‘아메리카(America)’에서 따 온 이름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찬게즈가 에리카에 반하게 된 것은 그가 미국인으로서 성공적으로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반영한 서사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어요. 주제넘게도 내 인생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고, 내가 그렇게 거창한 환경에서 정말로 부유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게 되어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죠. 에리카는 내 가치를 보증해줬어요. 내가 행동하는 방식은 내 교양이 완벽하다는 걸 암시했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죠.(p.78)’

 

 

한편 찬게즈는 에리카와 점차 가까워지며 밤에 그녀와 사랑을 나누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에리카는 죽은 전 남자친구 크리스를 잊지 못해 힘겨워하다 결국 사랑을 나누는 데 실패했고, 찬게즈는 만족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만족스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어요. 내 만족감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죠. 그런데 수치심은 더 혼란스러운 것이었어요.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됨으로써 나 자신의 눈에 나의 품위를 떨어뜨렸는지도 모르죠. 어쩌면 나는 이상한 낭만적 삼각관계에서 죽은 사람이 계속 우위를 점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던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나는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고 당시에도 내가 에리카에게 끔찍한 해를 끼쳤다고 느꼈는지도 몰라요.(p.96)’

 

 

에리카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상실’로 실의에 빠진 미국과 미국인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찬게즈가 에리카와 관계를 맺는 행위에서 느낀 만족감은 미국 사회의 성공적인 일원이 되었다는 데서 온 충족감이며, 그녀와 관계 맺기에 실패하며 느끼는 수치심은 파키스탄 출신으로 미국이란 나라에 온전히 섞여 들어가지 못한 데서 오는 좌절감으로 보인다. 또한 에리카에게 해를 끼쳤다고 느끼는 두려움은, 911 테러의 가해국이 가져야 할 죄책감을 이슬람권 출신으로서 은연 중에 대신 짊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에리카는 전 남자친구 크리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점 더 큰 슬픔으로 빠져들어간다. 결국 에리카는 찬게즈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찬게즈는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추적해 그녀가 있다는 요양병원까지 가 보지만 그녀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911 테러는 세계 최강국이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라는 미국의 자부심을 깨 부수는 사건이었다. 에리카는 사라진 미국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잘 표현한 인물인 것이다.


후에 찬게즈는 에리카와의 사랑에 실패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문득 내가 그녀와 의사소통에 실패한 부분적인 이유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게 안정적인 중심이 없었던 거죠.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확신이 없었어요. 뉴욕인지, 라호르인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지 확신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녀가 도와 달라고 손을 뻗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실질적으로 줄 것이 없었던 거죠. 어쩌면 그래서 내가 크리스인 척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죠. 나 자신의 정체성이 너무 약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그래서, 그러니까 그녀 내부에 있는 고질적인 노스탤지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 에리카를 혼란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는지도 모르죠.(p.131)’

 

 

 

제3세계의 시선에서 911 테러를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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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파키스탄에서 주인공 찬게즈가 미국인 관광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911 테러 이후 여러 언론 보도와 소설에서 ‘실의에 빠진 미국’은 주로 피해국인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됐다. 그러나 이 소설은 찬게즈라는 인물을 통해 제3세계국의 시선에서 911 테러를 바라본다.


 

‘우리한테 나이프와 포크를 줄 거냐고요? 포크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손을 더럽힐 때가 됐어요. (…) 미국에서 이곳으로 오면 적응을 해야 해요. 다른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해요.(p.111)’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매 챕터의 시작에서 찬게즈가 미국인 관광객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어쩐지 찬게즈가 미국인 관광객을 쥐고 흔드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이야기가 들려지는 파키스탄에서 찬게즈는 자국민이고, 반대로 미국인 관광객은 이방인이다. 즉 찬게즈는 대화에서 자연스레 우위를 점하게 되는데, 실제로 이 소설에서 미국인 관광객의 발화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카페라는 어수선한 장소에서 낯선 이야기에 두려움에 떠는 듯한 미국인의 모습이 찬게즈의 입을 통해 묘사될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911 테러 이후 테러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이슬람권에 대한 국제적 반감과 타자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낸 이슬람권 출신 이민자에게 마이크를 돌린 소설로 볼 수 있다.


 

‘아주 드문 기습이나 테러리스트의 잔학 행위를 제외하고 자기 땅에서는 전쟁을 치른 적이 없는 나라에서 온 당신 같은 사람이 언제라도 전면적인 공격을 해 올 수 있는 100만 군대가 가까이에 진을 치고 있다는 걸 상상하면 아마 이상하겠죠.(p.114)’

 

 

 

본질적인 것은 잊고,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라?


 

이 소설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라는 제목을 가졌지만, 찬게즈의 이야기 속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찬게즈가 미국에서 다닌 언더우드샘슨이란 회사에서 근무 첫날부터 사원들에게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주입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재정에 관한 사항에만 신경을 쓰고 자산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들의 진짜 본질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p.89)’

 

 

다시 말해 언더우드샘슨은 오직 재정 자체(부분적)에만 집중하고, 인적 자원의 잠재력, 해고 시의 파장 등 그 외의 가치(전체적, 본질적)에 대해서는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인데, 극심한 자본주의적 원칙을 반영한 말로 들린다. 사실 이 소설이 ‘에리카’라는 인물의 이름을 ‘아메리카’, 즉 미국에서 따 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언더우드샘슨(Underwood Samson)의 사명도 약칭으론 ‘U.S.’, 즉 미국을 뜻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즉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최정점에 있는 미국을 언더우드샘슨이란 회사로 상징해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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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게즈는 산티아고에 있는 출판사의 재정평가 업무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상사로부터 다른 기업적 가치는 모두 배제하고 오직 출판사의 재정사항만을 평가하여 자산 가치를 측정하라고 요구받는다. 이러한 부사장의 지시에 반발심이 든 찬게즈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직업이라는 작은 세계의 구조에 그렇게 완전히 빠져 있는 그를 존경할 수 없었어요. 그래요, 나도 전에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회사의 충고에서 위안을 얻었죠. 하지만 이제는 금융 거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현재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인적, 정치적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거죠. 다시 말해, 내 블라인드가 걷히고 있었던 거예요.(p.129)’

 

 

여기에 당시 아프간 전쟁의 파장으로 고향인 파키스탄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져 찬게즈는 언더우드샘슨을 사직하게 된다. 그리고 언더우드샘슨으로 상징되는 미국을 떠나 고향인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에 깊숙이 물든 미국에 대한 실망과 911 테러 이전부터 지속돼 온 정체성적 고민이 맞물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찬게즈의 환상이 완전히 부서지게 된 것이다.

 

 

 

어쩌다보니 근본주의자가 된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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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인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찬게즈가 ‘어쩔 수 없이 근본주의자가 돼 버렸다’는 결과론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찬게즈가 근본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가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극단적 종교 원칙주의와는 별개로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근본주의자가 됐다는 것이 아닐지. 결과적으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미국인들의 색안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근본주의자가 돼 버린 찬게즈를 잘 표현한 소설인 것 같다.


찬게즈의 정체성적 고충과는 별개로 극단적 근본주의를 따르는 이슬람 무장세력들의 테러행위는 어떻게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한편 이런 맥락에서 모신 하미드가 지은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9.11 테러를 미국인의 시각이 아닌 무고한 이슬람인의 시각에서 바라봤다는 데 의의를 두면 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은 민감한 언어였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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