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후반의 가상 세계에서 원인과 감염 경로도 알 수 없고, 따라서 치료법도 없는 전염병이 발생해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암담함 속에서 가족과 동료를 모두 잃고, 인간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최후의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인간 멸종 또는 지구 종말을 다루는 ‘종말 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메리셸리는 ‘프랑켄슈타인’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작가이다. 메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하고 난 후에 ‘최후의 인간’을 집필했는데, 그 때가 그녀의 남편과 자식들이 사망했을 즈음이다. 그녀가 삶의 동반자들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이 소설에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2권에서 전염병으로 점점 한 사람씩 죽어가면서, 결국에는 단 한명만이 전염병으로 망가진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게 된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책 속을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아마 메리셸리는 그 인물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이 문학이 현대에 무슨 시사점을 주고있는지도 유심히 살펴보고자 했다.
책 속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함으로써, 책 속 여러 인물들이 보편적 이상향이라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이 부서지는 것들이 보여진다. 디스토피아로 바뀌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안주할 수 있었던 상황, 그리고 그러한 안주가 계속되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상향 말이다. 책 속에서 메리셸리는 역병이 창궐하는 2100년 영국이라는 배경을 설정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생각해왔던 보편적 이상향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1권은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질투, 권력갈등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있어 처음에는 인상깊지 않았다. 진정한 디스토피아 문학, 종말 문학의 시작은 2권부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리셸리가 1권을 괜히 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1권에서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에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들이 각각 가지고있는 보편적 이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 2권에서 이러한 보편적 이상향이 디스토피아 상황에서 어떻게 소멸되어가는지를 주축으로 두고 소설을 집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전염병은 예측 불가능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생각해왔던 근거있는 미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건을 전개해나간다. 전염병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있던 모든 보편적 이상향들을 없애는 데 기여한다. 최고의 가치라고 평가받던 부와 명예, 그리고 신분의 차이,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은 사고들은 전염병이라는 강제적인 장치에 의하여 사라진다.
계층의 차이, 권력, 부유함과 같은 개념들은 아침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살아있는 거지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 귀족들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 아아! 죽은 영웅들과 애국자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루가 더 중요했다. ...(중략)...
삶, 그리고 또 삶... 짐승 같은 우리의 본능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삶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소망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인류는 오만했던 야망을 접고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읊조릴 뿐이었다. (2권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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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각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말 보편적 이상향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에이드리언와 레이몬드를 언급하고싶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 이상향이라고 함은 보편적이라는 것이지 옳은 이상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에이드리언은 영국을 파라다이스로 만들려 하는 이상주의적 계획이 있다. 또한, 레이몬드에게선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드러난 부분을 찾을 수가 있다. 배경이 영국이다보니, 대영제국의 위상을 되찾고자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사고한 모습이 보여진다. 레이몬드는 유럽인으로서 인간 문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해 유럽 대륙 밖으로 터키 인들을 몰아내려고 한다. 터키인들을 비주류로 보고, 경계 밖 인물로 보고 유럽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은 그들의 보편적인 이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성을 향한 보편적 이상향 또한 책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여성 또한 동일한 경계 내에 두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거의 모든 보편적 이상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후반부에 클라라를 향한 시선이다. 라이오넬, 에이드리언, 에블린, 클라라 이렇게 4명만 살아남았을 때, 여성인 클라라를 향한 시선은 평등하지 못 하다. 클라라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딸, 어머니, 아내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게 된다. 아래는 백작부인이 떠나갈 때, 클라라에게 그녀가 다해야 할 많은 소명을 말 해주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세상에 4명만 남았을 때에도, 여전히 평등한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 여전히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귀여운 아이야, 네가 나에게 했던 역할을 에이드리언에게 해주렴.
너의 기운 찬 말들로 그의 슬픔에 활기를 주고 진지하고 영감에 가득 찬 대화로 그의 고뇌를 달래주렴.
그가 죽어갈 때는 네가 나를 간호했던 것처럼 그를 간호해주어라.”
소설 속 주류를 점하고 있는 백인 및 남성의 공동체는 모두를 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유색인과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이상 사회는 안과 밖,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명확한 제한적인 공동체였다. 나는 이러한 배타적인 공동체를 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없이 평등한지에 대해 성찰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을 해 본 결과, 현재 21세기에도 주류와 비주류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 사이 간극도 꽤 넓다고 느꼈다. 한국인, 그리고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고려해보았을 때, 백인과 유색인종,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집단의 경계가 나뉘어진 상황들이 생각이 났다. 우린 몇 년전까지만 해도 코로나, 즉 <최후의 인간> 속에서 역병이 돌고있는 그 상황과 꽤나 비슷한 배경에 처해있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백인과 유색인종의 경계가 분명하다고 느낀다.
2021년 3월에 일어난 ‘미국 애틀랜타 총격사건’이 대표적인 그 예시이다. 이 사건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으로, 해당 사건 피해자 8명 중 6명이 아시아계 여성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코로나로 전세계가 힘들어하는 가운데, 코로나의 주범이라고 여겨지는 아시아인들을 향한 혐오와, 평소부터 가지고있었던 아시아인들을 향한 분노가 집약되어 폭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말고도 최근 아시아인을 겨냥한 증오범죄가 굉장히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아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최후의 인간>이라는 문학이 19세기 텍스트로만 머물러있는 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 현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메리셸리는 <최후의 인간> 속에서 이러한 배타적인 공동체를 ‘전염병’이라는 장치를 통해 강제적으로 소멸시켰지만, 현실에서는 대화와 협력을 통해 분명한 경계들을 지워나가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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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을 읽으면서 19세기에 쓰여졌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현재 상황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대목들이 많다고 느꼈다. 마치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있을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책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정서들이 비슷해서 몰입을 하기가 쉬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메리 셸리가 추구하는 삶과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최후의 인간>은 최초의 종말 문학이며, ‘디스토피아’ 소설을 개척한 작품이라고도 불리운다. 나는 디스토피아 소설에서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지까지 작가는 암묵적으로 얘기를 한다고 믿어왔다.
나는 마지막 남은 생존자가 현실에 순응하며, 기록을 하는 것,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그가 추구한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책 속의 상황이 현재의 상황과 비슷한만큼 메리셸리가 <최후의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시사점을 주고자 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봄직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