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하반기 미술관 안내원으로 일했다. 미술관에서 일하다보면 종종 세상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예술작품과 나 이렇게 두 존재만 남겨진다. 관람객이 없을 때, 작품들과 나만이 존재하는 그 고요의 순간은 시간이 멈춘것 같이 경이로움 그 자체다. 시계도 없고 창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그 공간에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을때면 작품들이 때로 말을 걸어오고, 어제와는 다른 이야기가 보이기도 한다.
패트릭 브링리의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발견했을 때, 나는 운명처럼 이끌렸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10년간 경비원으로 일한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와 같은 공간, 그러나 더욱 긴 시대를 담고, 다양한 거장드르이 작품을 담고 있는 거대하고 장엄한 곳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특별한 선물
2023년 출간되어 큰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최근 전면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이번 한국어판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저자 패트릭 브링리가 오직 한국 독자들만을 위해 써 내려간 서문과, 본문 속 작품 167점을 바로 감상할 수 있는 QR코드가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QR코드를 통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그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전시실을 거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고독한 글쓰기가 바다 건너 한국에서 이토록 뜨거운 공감을 얻을 줄 몰랐다며 놀라움과 감사를 표한다. 또한 한국의 젊은 독자들이 이 책을 '해독제'처럼 느꼈다는 평을 강조한다. 모두가 앞을 향해 달려갈 때, 잠시 멈춰 삶의 속도를 늦추고 정말 중요한 것을 찾아 나선 그의 여정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 지친 이들에게 깊은 위로를 준 것이다. 또한, 전문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그의 태도가 예술을 어렵게 느끼던 이들의 마음을 열었다고 말한다. "어디에나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많은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아마추어'이며, 그렇기에 더 자유롭게 예술과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은 큰 울림을 준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
패트릭 브링리는 《뉴요커》에서 일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유망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우상이자 세상의 전부였던 형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는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만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다.
어린 시절, 그에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동화 같은 곳이었다. 피아노를 사랑했던 아버지의 철학, "재능이란 즐거움에서 비롯된 부지런함"이라는 말은 훗날 그가 예술의 높은 문턱 앞에서 주저하지 않도록 이끈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우상이던 형처럼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어 학문적 도구를 갖춰 예술을 배우려 했던 그였지만, 형이 병상에 눕자 삶의 우선순위는 송두리째 뒤바뀐다. 화려한 고층 빌딩 사무실이 아닌, 형의 곁을 지키던 고요한 병실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간다.
그는 지난날까지 계속 나아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훈련을 받고 운전면허를 따고. 그러나 지금 할 일은 그저 고개를 들고 있는 일뿐이다.
"두 손은 비워두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을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역할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일을 선택했다. 푸른 제복을 입은 경비원은 큐레이터보다 더 오랜 시간 작품 곁에 머문다. 스쳐 지나가는 관람객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작품과 나누는 깊은 교감의 시간을 가졌다. 관람객이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예술품과 마주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 작품이 말을 걸어오고,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다.
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미술관의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개관 30분 전, 그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와 렘브란트, 보티첼리, 그리고 수많은 옛 거장들뿐이다. 그는 옛 거장 전시관을 거닐며 낯설고 먼 땅을 홀로 여행하는 듯한 완벽한 몰입을 경험한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스페인 왕녀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그림을 보는 순간, 화가가 왕녀와 같은 공간에 서서 마법을 부리는 장면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열네 살 소녀의 앳된 얼굴이지만 나이에 비해 성숙한 눈, 이상한 삶에 익숙해져 더는 후퇴나 양보를 모르는 듯한 그 얼굴에서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듯 특별한 교감을 하게 된다.
<잠든 하녀>, 메트로폴리탄 공식 홈페이지, QR을 찍으면 나오는 화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잠든 하녀> 앞에서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졸고 있는 하녀와 잘 정돈된 집 안의 풍경. 페르메이르 특유의 빛 속에서 그는 작가가 포착한 것이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깃든 장대함과 성스러움'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형의 병실에서 느꼈던 감정이자, 고요한 미술관의 아침마다 떠올리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는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상실을 마주하고, 슬픔을 어루만지며, 조금씩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잠시 쉼이 필요한 당신에게
수천 년의 시간을 품은 거장들의 작품은 그 깊이만큼이나 거대한 위로를 건넨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자꾸만 숨고 싶을 때, 예술은 나에게 '너와 같은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고, '해낼 수 있다'고 속삭여준다. 패트릭 브링리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되찾았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도 따뜻한 용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멈춤이 필요한 그대에게, 완벽한 고요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고 싶은 그대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당신도 이 책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