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습관이나 취향은 커 가면서 상당 부분 바뀌지만, 어떤 것들은 어릴 적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여기, 아주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아이는 자라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어른이 된 사람이 되었다.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은 TV를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랬기 때문에 부모님의 일로 가끔 친척집에 머무르거나 드물게 집에 혼자 남겨질 때마다 TV를 틀어 애니메이션을 봤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즐거운 일로 각인된 듯도 하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에 새로운, 그리고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접할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지난 9월 21일 CGV연남에서 열린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5'에 방문했다. 특히 국내 애니메이터들 각각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관람한 경험은 최근 했던 문화 경험 중 무척 특별하게 기억됐다.
올해 초 <퇴마록>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고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던 한국 애니메이터들의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준 서울인디애니페스타는 그 희망을 강한 염원으로 만들어주었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빛나는 상상력으로 뭉친 꿈의 영상, 애니메이션
이번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5에서 관람한 세션은 <독립보행1>과 <한국 파노라마2: 흔들리며 나아가기>였다. <독립보행1>에서는 애니메이터 개개인의 시선이 드러나는 독특한 세계관의 애니메이션 여섯 편을, <한국 파노라마2: 흔들리며 나아가기>에서는 그 제목처럼 들꽃처럼 세상의 풍파에 흔들려도, 흔들리며 나아가는 여러 삶의 모습을 그린 애니메이션 여덟 편을 볼 수 있었다.

<독립보행 1>에서 관람하고 가장 긴 여운이 남았던 작품은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와 채찍을 든 남자'와 '소화불량'이었다. 두 작품 모두 감상한 후에 묵직한 감정을 남기지만, 서로 상당히 다른 끝맛을 지녔다.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와 채찍을 든 남자'는 모두가 사랑을 하는 별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외로움을 품은 여자의 이야기와 긴 외로움의 끝에 찾아온 사랑의 가능성을 그려냈다. '소화불량'은 공모전을 준비하는 무명 작가가 그림을 그리며 음식을 먹던 중, 파리를 삼킨 후 뱃속에서 파리가 자라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꿈과 현실이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뒤섞이는 기묘한 이야기를 담았다.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와 채찍을 든 남자'는 무채색에 펜으로 그린 듯한 작화가 인상적이었다. 그림만 보면 동화 같지만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일지라도 채도 없는 색으로 칠해져 우울한 분위기를 띤다. 이것이 곧 이 작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정서를 지배한다. 행복도 살 수 있는 백화점이 있는 세상이지만, 세상을 내려다 보는 남자의 등에는 채찍 흉터가 가득하고 옷을 껴 입은 여자는 끝나지 않는 추위를 느낀다. 여자는 행복 백화점에서 행복을 찾아보려 하고 행복을 연기하지만, 백화점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그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옥상에서 추락하는 그를 채찍을 든 남자가 붙잡는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시작할까요?"라는 감독의 말에서 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여자와 남자 두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옷을 껴입고 있어도 추위를 떨쳐내지 못하는 여자와 채찍을 들고 있는 것은 본인임에도 몸에 채찍 흉터가 가득한 남자. 남자가 외로운 여자를 내내 지켜보다 채찍으로 여자를 구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무척 절묘하게 다가왔다. 여자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채찍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남자가 채찍을 휘둘러도 여자를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기에 운명 같은 사랑의 시작을 보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보잘 것 없다고 느끼지 못했다.
'소화불량'은 끔찍한 환상이 현실의 지저분한 방의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괴한 호접몽을 그려낸다. 파리 그림을 그리면서 인스턴트 컵밥을 먹다 그 안에 들어간 파리를 씹은 주인공은 화장실로 달려가 음식을 게워낸다. 그 후로 뱃속에는 파리가 자라는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지만, 몸 안에서 파리는 끝도 없이 자라난다. 불현듯 벽에 붙여둔 스케치 더미 사이에서 파리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종이를 떼어낸다. 종이를 떼어내니 그 안에는 파리가 유충을 갉아먹고 있다. 파리가 주인공을 덮친 후, 파리로 변한 주인공이 파리를 먹고 있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작품에서 방에 틀어박혀 청소할 틈도 없이 그림만 그리는 히키코모리 같은 주인공의 생태는 파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짐작하건대 이는 뭇 무명작가들이 쉽게 품을 법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대한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랫동안 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막연한 미래의 빛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신이 파리가 되어 가는 것만 같은 자조감과 두려움이 곰팡이처럼 피어오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소화불량'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은 간지럼증을 느끼며 감히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한국 파노라마 2: 흔들리며 나아가기>는 도처에서,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삶의 단편들을 그려냈다. '구렁덩덩'과 '사각사각'은 특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내는 애니메이터들의 상상력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구렁덩덩'은 구전 설화인 구렁덩덩 신선비의 이야기를 현대 여성의 시선에서 각색하고 새로 쓴 애니메이션이다. 구렁이 신랑과 혼인한 새신부는 언니들이 뱀 허물을 태운 후 종적을 감춘 남편을 찾아 나선다. 여행 중 새신부는 신랑의 행방을 묻기 위해 만난 이들이 준 과제를 현명하게 해결하고 때로는 모습을 바꿔가기까지 하며 신랑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신랑을 만난 후 그는 새신랑의 새신부와 겨뤄 이기지만, 어여쁜 신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신부는 구렁이가 되어 있다. 새신랑은 놀라 신부를 방 안에 가두고 태워버리고, 이후 종적을 감춘 새신부에 대한 소문만 무성해진다.
'구렁덩덩'은 여정의 주인공은 새신부임에도 그 제목이 '구렁덩덩'인 데서 모순을 느껴 이러한 전개로 각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의 시작은 여성의 남편 찾기가 목적이었으나 이야기의 끝에서 여성은 한 명의 부군에 헌신하는 열녀의 모습이 아닌 뱀의 모습이 된다. 어떤 연유에서든 가정으로 회귀하는 여성으로 남지 않는 결말로써 여성의 공이 가정의 보전으로 돌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남편이 뱀이었던 자신을 품어준 아내와 달리 아내의 몸에 직접 불을 놓는 내용 또한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이를 통해 '구렁덩덩 신선비'가 갖는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조리함을 여실히 느끼고, 현대 여성이 이야기를 새롭게 그리는 데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각사각'은 보는 내내 직선에서 곡선으로 트랜지션되는 아이디어와 한국의 전통적인 디자인 요소를 활용한 아이디어에 감탄했던 애니메이션이다.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현대 한국 학생이 받는 학업에 대한 부모의 압박에 관한 이야기가 교차되며 두 인물은 운명의 평행선에 놓인 존재로 묘사된다. 사각형과 원의 요소는 두 인물이 느끼는 분노와 공허, 답답한 심정을 그려낸다. 사도세자와 마찬가지로 자식이기만 해서는 도저히 충족할 수 없는 부모의 기대는 뒤주처럼 아이의 몸을 옥죄어 온다. 이는 공부를 하는 방의 네모난 형상과 꼭 닮아 있기도 하다.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큰 스트레스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늦기 전에 아이를 스터디 박스에서 꺼내준다.
'사각사각'은 사각형과 종이에 글을 쓰는 소리를 연상케 하는 의성어를 모두 연상시키는 탁월한 제목이다. 사각사각 쓰는 소리가 이토록 숨막히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보며 느꼈다. 감독은 과거의 사도세자와 현대의 아이가 처한 각 상황의 접점을 발견하고, 사도세자의 최후를 교훈 삼아 현대의 어른들이 지금은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 희망은 작품의 결말에 잘 녹아 있다. 사실 '사각사각'을 보며 주인공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음을 발견해 큰 슬픔을 느꼈다. 그렇기에 감독의 바람에 더더욱 공감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어른들이 이를 보기를 바라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
서울인디애니페스트 2025의 모든 작품을 관람할 여력은 되지 않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더 많은 작품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현실적인 감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작품 속에 자신들의 희망과 바람을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볼수록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길이나 기법과 관계 없이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독창적인 방법으로 꿈을 꾸게 해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내년에도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꿈의 축제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