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 제목, 연극 [맆소녀]를 풀어 쓰면 이는 '담뱃잎을 따는 소녀'이다.
이름처럼 [맆소녀]는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평생 담뱃잎을 따는 일만을 해온 한 소녀의 몸과 그 몸에 새겨진 기억의 파편을 응시하게 만든다. 작품은 봉사 활동을 위해 인도에 방문한 '연영' 이 소녀(까이)의 실종과 그 침묵의 기원을 추적하는 구조를 따라가며, 오랜 시간과 많은 사람이 얽혀 쌓아낸 폭력의 계보를 신화적인 서사와 연결지어 풀어낸다.
이 이야기가 모두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슬플 정도로 현실적인 대사들은 결국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결코 놓지 않게 만든다.

연극 [맆소녀] 의 포스터
오랜 시간이 중첩되어 폭력을 낳듯 중첩된 글자들과
인도에서 소중히 여기는 동물인 소의 꼬리로 처리한
글자의 끝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공연은 대사에 치중하기 보다는 움직임과 호흡, 거리감과 접촉, 그리고 자연의 소리를 통해 많은 것들을 전달한다. 언어보다 앞서 움직이는 몸의 언어는 파편화된 기억의 세계를 이성보다 감각으로 먼저 체득하게 만들며, 언어화 되었을 시 다소 폭력적일 수 있는 것들은 움직임으로 부수어져 관객에게 전해진다.
무대 또한 이러한 연출과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감히 미니멀한 구성을 택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거대한 장치나 장식은 배치하는 대신, 배경과 소품을 최소화하여 배우의 감정선과, 그것을 둘러싼 고요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어 있는 공간들은 연영의 기억처럼 거대한 공백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등장인물들의 몸이 하나씩 흔적을 새기며 이야기를 빚어내 공백을 적당히 채워갔다. 이 절제는 자극을 최소화하면서도 상상과 해석의 여백을 극대화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깊이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이외에도, 모든 연출적 요소들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파편’이라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들레 홀씨를 부수면 낱낱히 흩어지지만 결국 각각이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것처럼, 파편은 곧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이다. 작품 속의 자라지 못한 아이들은 세계 곳곳에서 폭력에 의해 멈춰버린 존재들을 상징하며, 그들이 서로의 몸을 발견하고 연대하며 독립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폭력의 역사에 맞서는 공동체적 회복력의 은유로 읽혀졌다.
연영이 까이를 만나고, 돕고, 결국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흐름은 바로 이 은유의 완성이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그 대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 또한 돌보는 일임을 단순한 구호 따위가 아닌, 세련된 형태로 녹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가슴에 와닿았다. 평소라면 완전히 닫힌 결말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이 공연에서는 오히려 그 결말이 끝이 아닌 삶의 지속처럼 느껴졌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연영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았고, 이 여운은 곧 공연이 전하고자 하는 연대의 가치와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 (실제로 [맆소녀]의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책임을 교차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인 수어 통역과 자막 해설, 열린 객석을 제공, 아동학대 신고의무자 대상 할인 운영한다는 점 등이 눈에 띄었다.)
공연의 두 주인공인 연영과 까이는 결국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채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누군가이자, 동시에 우리이기도 하다. 공연은 러닝타임 내내, 혹은 그 이후까지도 타인의 파편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그 위에 삶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다.
우리는 함께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래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시선을 돌려야 함을 이토록 세련된 방식으로 일깨워준 공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