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btyrinth] 불안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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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떨쳐낸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 사실,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돌이켜보면, 나는 (어쩌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평생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 작게는 어린 시절, 내일 선생님께 혼나지 않을지, 하는 불안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앞으로 내가 나아가려 하는 길에 진정으로 재능과 뜻이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물론 이는 비단 나 스스로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불안의 사회이다. 인류에게 찾아온 눈부신 발전은 너무나 많은 선택지를 안겨주었고, 우리는 그 선택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택하며 그로 인해 다가올 미래를 걱정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원동력에도 불안이라는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리고 좋아하는 일로 잠깐의 즐거움이나마 얻고 싶어서 라는 이유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붓을 잡아왔던 것 같다. 연필을 잡고 무언가의 형상을 스케치하고, 물감으로 그 위를 덧칠할 때면 잠깐이나마 그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고, 나를 둘러싼 불안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할 즈음,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도 함께 찾아왔다. 학교는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곳이었지만 전공 수업 외에는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기에 통학을 하며 수업을 들었다. 집으로 오면 통학에 많은 힘을 쏟았다는 핑계로 (왕복 4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과제를 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누워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사실, 과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면담 30분 전까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울면서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고, 내 그림을 보여주기 부끄러워 중요한 면담에 일부러 결석한 정도 종종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면 그간의 불안을 잠시 내려두고 생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틀렸던 것임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대학에는 너무도 많은 선택지가 존재했고, 그 선택지들 사이에서 나는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 즈음 그린 것이 <불안_침대가 나를 잡아먹는다> 연작이었다.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크기지만, 그때 그린 그림이 대학에 다니는 사 년 내내 작업할 그림의 기틀이 되어주고,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내 평생의 고민이자 원동력이었던, 불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가시덤불 원주민, oil on canvas, 145 x 89 cm, 2024.
미완성 작업이지만, 슬럼프를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준 그림이기에 특히 애착이 간다.
그러한 불안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것이 가장 최근 그림을 그렸던 것이 그간 작업했던 <미지> 시리즈에서 벗어난 것의 이유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그로테스크하고도 강렬한 나뭇가지들 속에 앉아 있지만, 어떠한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 그저 화면 밖의 관객을 바라보거나, 관조할 뿐이다. 조금은 징그러울 정도로 그려진 숲은 곧 나의 불안이었다. 빠져나갈 수 없고, 때로는 나를 찌르는 가시덤불 같은 숲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불안이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차라리 그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이라는 숲을 빠져나가려 부단히 애쓰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물론, 병적인 불안이 불쑥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이라는 커다란 숲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일부는 분명 위험하지만, 눈을 돌리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 것처럼, 앞으로의 나는 불안이라는 숲에서 생긴 상처에 집중하지 않으려 한다. 그보다는 그 숲이 가진 어떠한 방향성과, 그것이 가져온 경험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숲에서 주저앉으면 그 다음으로는 나아갈 수 없으니, 작업을 위해, 동시에 나 스스로를 위해 불안에도 의연히 대처하고 싶다. 사실은 태초부터 불안에 숲에 살았던 원주민처럼 말이다.
[윤소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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