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 중 하나로 ‘지평좌표계 밈’이 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귀신이 제자리에 존재하려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귀신을 본다면 무서워하는 대신, “어? 지박령이다!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라고 물어보란다.
너무 과학적이어서 도리어 황당무계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인데,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이번에는 책에서 보았다. 과학책이 아닌 산문집이고, ‘인디언(인도인을 말하고 싶었는지 아메리카 원주민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의 이야기를 빌려와 언급하는 부분이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 그것이 여행자에게 영혼이 없는 이유다. 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p.58)
<영혼 없는 작가>의 저자 다와다 요코는 일본어와 독일어를 모두 쓰는 작가다. 요코는 그가 처음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유럽에 오는 길에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영혼 없는 작가가 된다.
일본에서 자라고 독일에서 공부한 요코는 두 언어 모두 쓰고(use), 심지어는 쓰기(write)까지 한다. 독일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그의 독일어 작품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 걸 보면 독일어를 일본어만큼 구사할 수 있는 듯하다. 어떠한 측면에서는 모국어보다도 더 날카롭게 구사할지도 모른다. 남의 언어를 쓸 때면 그렇게 된다. 입에 붙은 채로 쓰는 게 아니라, 머리로 먼저 배우는 언어는 우리를 예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 번 예민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면, 내 입과 머리 사이의 간극을 느끼고 나면, 내 언어를 쓸 때도 돌연 괴리감을 느낀다.
(독일어를 쓸 때)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들은 내 감정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어에도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p.83)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오는 감상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 학구열은 그만큼 좋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직접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기보다는 남의 경험을 훔쳐보는 편이다. 예전에 읽었던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도 그래서 재밌게 읽었다. 그 책은 루마니아어를 공부하다가 루마니아어 작가가 된 일본인의 에세이다. 남의 경험을, 특히 언어와 관련된 남의 경험을 훔쳐 올 때는 당연히 한국어 사용자의 이야기가 제일 공감하기 좋고, 그다음 좋은 것은 일본어 사용자의 경험이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순도 비슷하고, 공유하는 한자 단어도 많으므로. 그래서 요코가 자신의 감상을 공유할 때 나도 공감하기 쉬웠다.
요코는 새로운 언어와의 조우를 ‘입양’이라고 표현하며 ‘유년 시절을 다시 한번 겪’는다고까지 말한다(p.46). 전혀 과한 표현이 아니다. 언어를 배울 때 관용구나 기본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 해석하는 것은 외국인, 그리고 어린아이의 특징이다. 내가 독일어를 배울 때도 비슷했다. 아주 기초만 깔짝여봤을 뿐이지만, 독일어 문법을 배우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독일어 선생님께 질문 세례를 하면 선생님도 말문이 막힐 때가 있었다(선생님이 정식 선생님이 아닌, 원어민 학생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문법이 나오면, 이건 마음으로 배워야 하는 거라고learn by heart 했다. 마음이란 단어 때문에 착각할 수 있지만 ‘그냥 외워’와 다를 게 없는 표현이다. 게다가 내 선생님은 정말 안타까운 표정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마음을 다해 이 말을 했기에 더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본인은 그냥 외운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배웠다는 듯… 이 복잡미묘한 기분과는 별개로 좋은 선생님이었다만.
결과적으로 독일어를 배우다가 말았던지라 나는 영원히 그 규칙들을 마음으로 배우지 못했다. 마음으로 배우는 순간에 내가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걸 배운 내 마음은 한국인인 나의 마음이 아니라 독일인인 나의 마음일 터. 마음과 영혼을 동일시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대충 퉁칠 수 있는 거라면, 요코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날아갈 때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느낀 것이 무리도 아니다. 요코는 일본인 요코의 마음을 일본에 남겨두고, 이제 독일인 요코의 마음을 키워나가야 했다.
요코가 말하는 ‘영혼 없음’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시체 같음’과 다르다. 나와 내 영혼이 정말로 똑같은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안다는 의미에 가깝다. 영혼 없는 작가는 그런 뜻이다. 나와 내 영혼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작가. 어쩌면 작가는 영혼이 없어야, 그러니까 본인과 본인의 영혼을 잘 분리할 수 있어야, 좋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래야 여러 영혼을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또 요코는 벤야민의 말을 인용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꾼에는 두 부류가 있다.’(p.58) 멀리서 온 사람들, 그리고 한 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 긴 시간을 살거나, 긴 공간을 살거나. 요코는 이 두 부류의 교집합으로써 세 번째 부류를 제안한다.
뱃사람보다 더 멀리 여행하고 가장 나이 많은 농부보다 같은 장소에 더 오래 산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죽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재미난 이야기꾼은 없다.
(p.59)
‘죽은 사람들’은 흔히들 ‘영혼만 남은 사람들’로 통한다. 혹은 ‘영혼’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코의 표현을 빌려오면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죽은 이들은 모두 ‘나’ 없이 ‘내 영혼’만 가진 채니까. 영혼만 남았기에 모순되게도 영혼 없는 자들이 된 영혼들. 그들만큼 본인과 본인의 영혼을 잘 분리하는 사람들도 없을 테니, 영혼 없는 이들 중에서도 제일 영혼이 없다. 작가가 될 좋은 재원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가장 재미난 이야기꾼이라는 말은 참이다. 물론 이야기꾼과 작가가 같은 말이라고 대충 퉁칠 때나 가능한 말이다.
또 우리는 귀신이 존재한다고 대충 퉁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귀신을 만났을 때 할 말을 하나 추가할 수 있겠다. 어? 지박령이다!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 “그리고 재밌는 이야기 하나만 해주세요!” 누구라도 귀신을 만나는 사람은 이 가장 재미난 이야기꾼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