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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2024를 먼저 썼다가 4를 지우고 다시 5를 적는 멍청한 짓을 끊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21세기의 스물네 번째 해를 지나 스물다섯 번째 해가 시작되었고 우린 또 한 살을 먹었다.


2024년의 1월이 떠오른다. 중학교 동창 둘을 만났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말은, 서로의 중2병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하고 경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이라고 지칭될 정도로 다수가 인정하는 질풍노도의 시기, 또는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어두운 과거를 차고 넘치도록 생산하는 시기, 중학교 2학년. 우리는 그 시절을 같이 보냈다. 질풍노도의 시기든, 어두운 과거든, 열다섯이든.

 

 

 

우매함의 봉우리


 

열다섯이라는 평범한 숫자는 어쩌다 그렇게 무서운 나이가 되었나. 이를 밈처럼 떠도는 심리학 용어, 더닝 크루거(Dunning-Kruger) 곡선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요지부터 말하자면 '무식하면 용감하다', 또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과 비슷한 개념을 그래프로도 나타내주는 것이 더닝 크루거 곡선이다. x축으로는 지식과 경험을, y축으로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이 그래프는 단순한 우상향을 그리지 않는다. 지식과 자신감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식도 자신감도 낮은 상태로, 원점과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한 그래프는 첫 단계에서 천장을 뚫을 기세로 치솟는다. 처음 지식을 얻기 시작하는 시기에는 자신감이 거침없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는 전혀 그럴 깜냥이 아닌데도 자기 자신을 매우 고평가하는 상황. 이를 우매함의 봉우리(Peak of Mt. Stupid)라 부른다. 앞서 말했듯이, 무식하면 용감하고 빈 수레는 요란하다. 우매함의 봉우리라는 나름 멋들어진 번역도 있지만 그냥 ‘멍청이 산’이 더 분수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한다.


지식과 경험을 나타내는 x축을 나이로 대체해도 괜찮다면, 십 대의 중반, 그리고 전체 인생의 초반에 해당하는 열다섯의 나이가 우매함의 봉우리, 아니 멍청이 산에 위치할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레 지식과 경험이 쌓인다는 근거는 없지만 연륜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 아예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아니라 말하고 싶다. 축적 또는 성장 속도가 균일하지는 않을지언정, 계속해서 쌓이고 자란다고 믿어야 그나마 보람 있지 않겠는가.

 

 

 

절망의 계곡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여기 있는 우매함은 고지대의 평원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봉우리다, 봉우리. 봉우리는 삐죽 솟아있어 가파른 오르막 뒤에 가파른 내리막이 있다는 뜻이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 열흘 요란한 빈 수레도 없는지, 꼭대기를 한번 콕 찍은 자신감은 치솟던 속도만큼이나 빠른 기세로 낙하해 바닥에 처박힌다. 여기가 절망의 계곡(Valley of Despair)이다. 아까는 자신감이 최고치였다면 지금은 최저치, 스스로를 현실적으로 평가하다 못해 과소평가하기에 이르는 때다.


다시 작년 연초에 만났다는 내 친구들로 돌아가서. 우리는 서로의 중학교 시절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고등학교 시절을 멀리서 알음알음 나눴다. 대학 졸업을 마주한 지금은 그사이의 거리를 오가며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중이다. 우리의 걱정은 더 이상 떨어진 수학 성적과 기타 등등이 아니라,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지와 기타 등등이다. 숫자놀음이 성적표에서 통장으로 옮겨간 것만 빼면 죄다 똑같은 고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에서 자조적인 농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잔뜩 늘어난 것 같다. 말로는 애써 가볍게 뱉어보지만 내 속에 넣고 있을 때는 무게가 꽤 나가는 고민으로 각자 앓는다.


친구 콩깍지일 수는 있겠지만, 자기 앞가림은 다들 잘하는 녀석들인데. 왜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막막함을 느끼는지. 대단히 잘난 구석이 있는 건 아닐지라도, 썩 못난 구석은 절대 없는 내 친구들인데 왜. 나만 고민이 많은 줄 알았을 때는 그냥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이 녀석들까지 다 끙끙대는 걸 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분명히 있다.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서 만난 우리가 어찌 이리되었나.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 있던 그때의 우리를 상상하며 앞을 내다봤더니 쭉 내리막길이 보인다. 그래, 어쩌면 이십 대의 중반이 이 절망의 계곡인 게 아닐까. 우매함의 봉우리에 섰던 우리가 미끄럼틀을 쭈욱 타고 내려와 절망의 계곡으로 뛰어든 것이렷다.


이게 정말이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다시 상승이다. 봉우리가 고지대의 평원이 아니었듯이, 계곡 또한 저지대의 평원이 아니다. 절망의 계곡 뒤에는 깨달음의 오르막과 지속가능성의 고원이 온다. 우매함의 봉우리에 오를 때처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오르다가 적당히 높은 지대에 다다르면 평탄한 길이 펼쳐진다.


물론 내 경험은 아니고 그냥 더닝 크루거 효과에 따르면 그런 것이라. 이 말만 들어서는 아무런 기대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떤 오르막이 준비되어 있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내리막길을 걷는 것보다 오르막길을 걷는 게 더 힘들다는 사실도 알기에 오르막길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마냥 달갑지는 않다.


그래서 난 다시 용을 찾는다. 가장 깊은 곳, 절망의 계곡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나를 데리고 날아오를 용을. 왜 뜬금없이 용이냐면, 누구나 다 용 한 마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검은 불꽃의 용, '흑염룡'이다.

 

 

 

흑염룡


 

흑염룡은 모 판타지 만화의 공격 기술에서 유래했다. 오른팔에서 검은 불꽃의 용을 꺼내 공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걸 이렇게 글로 설명하자니 정말 이상한 사람 같지만 일단 넘어가자. 이 흑염룡이 중2병의 상징이 된 것은 이후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라는 라이트노벨에서 한 인물이 제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그 안에 흑염룡이 날뛰고 있다고 말한 뒤다. 흑염룡이 처음 등장한 만화와 달리 이 라이트노벨의 장르는 판타지가 아니었고, 이 라이트노벨 주인공은 오직 중2병 환자만이 가질 수 있는 허세와 망상으로 이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이 꽤 유명해지며 많은 (비)웃음을 샀고, 덕분에 흑염룡은 중2병의 대명사가 되었다.


요즘은 그 흑염룡이 어디로 갔나 싶다. 흑염룡은 지금의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는 지난날을 쌓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잠시나마 꼭대기에 서 있게 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힘을 다시 빌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친구들과 고민과 걱정을 나누던 때도 그 흑염룡을 떠올렸다. 너 지금 어딨냐. 다시 좀 나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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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서 2024년으로 넘어가던 밤, 제야의 종이 울리고 단톡방이 잠깐 들썩들썩했다. 우린 다들 주문이라도 외듯 ‘건강하자’는 말을 반복했다. 몸도 몸이지만 다들 마음이 건강하길 바랐다. 2024년이 지나고 2025년을 맞이하는 첫날에도 번개로 이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날은 ‘잘돼’ 돌림노래를 불렀다. ‘잘되자’도 아니고 ‘잘될 거야’도 아니고 ‘잘’ ‘돼’ 이 두 글자로 종결짓는 데서 한 알의 불확실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불안정함이 돋보인다.


잘될 줄 안다. 잘 살아왔으니까. 부족한 것은 이 시간을 버티게 해줄 힘 하나뿐이다. 그 힘이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전에 한 번 경험해 본 것을 한 번 더 기대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흑염룡의 두 번째 비상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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