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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왓챠피디아에 기록한 관람 영화 수가 600개를 향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누가 취향을 물어도 선뜻 떠오르는 답이 없었는데 이젠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잔잔한 휴먼, 드라마 혹은 아예 급박한 스릴러, 재난 장르에서 주로 재미를 느낀다. 로맨스, 액션, 판타지 등에는 크게 감흥이 없다. 다만 작품 분위기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는데, 특히 멜로에 있어서는 달달한 사랑보다 처참히 망한 사랑이 오히려 설렌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이런 특이 취향에 부합하는 한국 영화를 몇 편 소개해 볼까 한다.
<무뢰한>(2015)
김남길은 형사 '정재곤', 전도연은 재곤이 쫓는 살인범의 애인 '김혜경' 역을 맡았다. 범인을 잡기 위해 재곤은 정체를 숨기고 혜경의 곁을 맴도는데, 그 과정에서 서서히 서로에게 흔들리게 된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며 보던 중, 마지막 30분에서 이 영화에 휘감기고 말았다. 혜경과 재곤이 집과 차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너무 좋아 몇 번을 돌려보았을 정도다. 둘의 진심이 끝내 엇갈리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배우들의 연기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성 간의 망한 사랑을 다룬 또 다른 유명작인 <헤어질 결심>(2022)이 연상되기도 한다.
남자 형사와 그의 추적 대상인 여자라는 구도가 유사한 편이다. 물론 <헤어질 결심>과 비교하면 <무뢰한>은 훨씬 거칠고 투박하다. <무뢰한>은 '하드보일드 멜로'임을 내세우는데, 하드보일드는 현실을 차갑고 건조하게 바라보는 문학적 스타일을 뜻한다. 이런 스타일로도 멜로의 감정선을 은은하게 내보이고 또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또, 개인적으로는 망한 사랑 중에서도 사랑해서 내가 죽는 것보다는 상대방을 죽이는 쪽(!)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무뢰한>을 소개하기로 했다. <헤어질 결심>에서 '홍산오'(박정민)와 '송서래'(탕웨이)는 모두 자신의 죽음을 택하지만, <무뢰한>의 혜경은 재곤을 칼로 찌르기 때문이다.
이런 색깔의 영화가 한국 영화계에 또 나와주기만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탈주>(2024) & <전,란>(2024)
2024년은 취향을 저격하는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 해였다.
먼저 <탈주>는 탈북을 계획하는 군인 '임규남'(이제훈)과, 그와 어려서 알고 지냈던 현 보위부 장교 '리현상'(구교환)의 추격전이다. 평범한 시놉시스지만 이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단연 현상 역 구교환 배우의 표현력이다.
규남을 대하는 현상의 태도는 미묘하다. 처음에는 규남을 살리려 도움을 주고, 그가 끝내 도망치자 추격에 나서지만 그 와중에도 흔들리는 순간이 많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규남을 죽이려 연신 총을 쐈으면서도 결국 온 마음이 흐트러진 채 보내주는 모습이 여운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한편 <전, 란>은 함께 자란 양반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오해로 멀어진 뒤, 전쟁터에서 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둘은 서로를 깊이 증오하며 칼을 휘두르지만, 일본 장수 '겐신'(정성일) 앞에서는 또 상대를 감싸주기도 하는 모습이 묘한 관계성을 형성한다.
두 남자 간 어렸을 적의 인연, 그리고 현재의 어긋남이라는 측면에서 유사성을 갖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퀴어 코드가 공식적으로 의도된 것은 없다고 하지만, 강동원 배우는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고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관객들도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으나, 꼭 성애적 의미든 아니든 간에 사랑과 죽음에 얽힌 엔딩이 매력적임은 분명하다.
<파과>(2025)
이 작품의 주인공은 60대 킬러 '조각'(이혜영)과 젊은 킬러 '투우'(김성철)다. 조각을 향한 투우의 날카로움과 분노, 살의가 점차 거세지는데 그것이 실은 어릴 적 자신의 집 가정부였던 조각에 대한 사랑과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이 드러나며 영화가 흥미로워진다.
마지막 대결 끝에 한쪽이 죽게 되지만, 오히려 그때가 서로를 향한 애틋함과 슬픔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만 하나, 싶다가도 미움의 유사어가 사랑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치열하고 파멸적인 사랑 이야기에 곧잘 매혹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영화들을 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