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으로 구원하느냐 혹은 붕괴하느냐 [영화]

박찬욱 표 사랑 영화,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
글 입력 2022.07.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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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과 <아가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19 이후로 웬만해서 잘 찾지 않았던 영화관에 오랜만에 들렀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을 보기 위해서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만큼 개봉 전부터 기대를 많이 하고 갔는데 그 기대를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고전적인 멜로물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수사물의 미스터리한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박찬욱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 편집으로 품격있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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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니 그동안 미루고 미뤄 두었던 그의 전작 <아가씨>를 꺼내 보고 싶어졌다. 당시 파격적인 동성애 정사씬과 페미니즘 영화라는 점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동성애와 페미니즘을 포르노적으로 소비할까 두려워서 였을까? 박찬욱 감독 영화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일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던 이번 신작을 계기로 그의 다른 사랑 이야기도 궁금해져서 마음 먹고 ott를 통해 <아가씨>를 감상했다.

 

 

 

신분의 차이, 그 선을 넘는 동질감과 연민


 

<헤어질 결심>과 <아가씨>의 주인공들은 각각 신분 또는 처지에 큰 차이가 있다. '형사와 용의자', '아가씨와 하녀'라는 것. 얼핏 양 극단에 위치해 있는 듯한 이 인물들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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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자신이 서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꼿꼿해서”라고 말한다. 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늘 꼿꼿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서래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

 

그런데 이는 해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부터 자부심을 가지는 형사 해준 역시 항상 꼿꼿해 보인다. 둘의 공통점은 취조실에서의 식사씬에서도 잘 드러난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손발을 척척 맞춰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모습은 서래와 해준이 비슷한 기질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어가 익숙한 서래와 한국인인 해준 사이에는 언어라는 간극이 존재함에도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이끌린다. 형사와 용의자라는 탈을 쓴 관계 속에서 해준은 감시라는 명목하에 서래를 지켜보고 걱정한다.

 

이런 해준의 진심을 느낀 서래는 그의 감시가 두렵기보단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같이 든든하다. 서래 역시 늘 피와 시체에 둘러싸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해준을 걱정하고 그에게 편안한 잠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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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이면에 얽히고설킨 각자의 욕망이 숨어 있음에도 일찍이 엄마를 여의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히데코의 말에 그의 양 볼을 부여잡고 숙희는 맑은 눈으로 힘주어 이야기한다. 히데코의 엄마는 분명 “너 낳고 죽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말이다.

 

이는 숙희의 엄마가 죽기 전 했던 말을 후에 이모에게 들은 말로, 숙희가 히데코에게 느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위장일 뿐인 관계임에도 히데코의 세계에 동화된 숙희는 진심으로 그를 가엽게 여긴다는 것이 드러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며 점점 사랑이 깊어진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결말


 

박찬욱 감독은 한 기자회견에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인물 사이에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관계 중 개인,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모든 개인이 서로 다른 특질을 지녔듯, 모든 사랑은 각자의 형태를 지닌다. 따라서 사랑의 결말 역시 제각기 다를수 밖에 없다. <헤어질 결심>은 붕괴하고 미제로 남겨지면서 비로소 완결되었고 <아가씨>는 폭력의 족쇄를 끊고 해방함으로써 완결되었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해준)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서요.” (서래)

 

서래와 해준은 영화 내내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위와 같은 말로 마음을 전달한다. 형사와 살인 사건의 용의자, 불륜 등과 같은 피상적인 이유보다는 위의 대사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의 본질적인 어떤 특성이 그 둘의 사랑을 미결이라는 결말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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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은 사건이 있어야 살아가는 인물이다.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벽면을 메운 끔찍한 사진들을 떼지 않는다. 직업적인 윤리 의식이 확고한 그는 서래를 만나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감정을 서서히 꽃피운다. 무엇이든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한 해준은 그놈의 여자 때문에 눈앞의 사건을 오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형사로서의 자부심이 곧 자신을 대변해 오던 해준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결국 서래를 떠나게 된다.


서래는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이다. 증조할아버지의 산을 찾기 위해 불법 체류자 신세를 불사하고 한국으로 향했으며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산에서 떠밀어 살해함으로써 스스로 탈출한다. 서래는 마지막의 순간까지 자신의 손으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바다에 잠기면서 해준에게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해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서래는 그와의 사랑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헤어짐의 결말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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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가씨>에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라는 히데코의 독백처럼 숙희는 히데코의 세상을 통째로 뒤흔들고 끝내 그를 구원한다. 부유한 귀족이지만 지독한 성적 학대의 세상에 갇혀 있던 히데코는 숙희의 손을 잡고 그곳을 탈출해 진심으로 웃어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과 일본인, 하녀로 위장한 도둑의 딸과 귀족 집안 아가씨... 극단적일 정도로 신분의 차이가 극명한 둘이지만 이 외에도 다른 점은 또 있다. 숙희는 소매치기, 사기꾼이면서도 어딘가 어리숙하고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다. 백작과 히데코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본래 임무도 잊고 저택이 떠나가라 쿵쾅대며 걸을 정도다. 반면, 차가운 얼굴의 히데코는 늘 자신의 감정을 감춘다. 아마 이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학대의 영향일 것이다.


히데코에게 자신과 전혀 다른 숙희는 존재 자체만으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장으로 가려진 관계에서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진실을 드러내게 되고 힘을 합해 이모부 코우스키와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이후 코우스키와 백작이 자멸하면서 끝없는 들판을 내달리듯 히데코와 숙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가부장적인 남성 사회를 탈출한 두 사람은 신분의 고저로부터도 벗어나 평등한 관계로 사랑하기에 이른다.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사랑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욕망의 본질은 결국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데에 원초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은 영화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사랑에 기인한 욕망과 그를 위한 행동이 이어지는 과정 및 결말을 잘 보여주는 멜로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박찬욱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들 농담인 줄 알지만 나는 로코 감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복수 시리즈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의 인상이 워낙 강한 탓에 그의 말이 조금 어색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멘트다. 특히 이번 <헤어질 결심>에서는 그간 그의 특징처럼 보여줬던 자극적인 요소를 거의 뺀 정통 멜로물의 느낌이라 더욱 그렇다.


다음 작품에서도 그가 사랑 이야기를 들고 나올지 알 수는 없지만 의외로(?) 로맨틱한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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