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머티리얼리스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데이트와 결혼은 점점 더 투자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사람들은 서로의 성장 환경과 집안 배경,소득 수준, 학벌을 저울질한다. 비슷한 조건이거나 혹은 한쪽이 월등해도 잃을 것 없는 장사여야 주선이 성사된다. 조건을 분석하고, 리스크를 따지고, 평가를 하고, 등급을 매긴다. 사랑은 어느새 앞으로 오를 주식처럼 미래 가치라는 이름으로 투자되는 중이다. 사람은 상품화되고, 사랑은 수치화된다.
문득 궁금해진다. 태초의 인간들은 무엇으로 사랑했을까. 그들에게도 졸업장이나 연봉, 집안 배경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면 눈길이 오래 머무는 외모, 그마저도 아니면 하루를 함께 보낸 시간들이 그들을 이어줬을까? 조건이라 부를 만한 것이 변변치 않던 시절,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했을까.
셀린 송 감독의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는 남녀 원시인이 물물교환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한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막을 여는 셈이다. 사랑은 언제부터 조건과 계산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는 사랑이라는 건 무엇인가.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영화의 주인공 루시(다코타 존슨)는 이른바 결혼정보 회사에서 일하는 매치메이커다. 겉으로는 결혼을 돕는 직업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철저히 상품으로 분류하는 일에 가깝다. 키는 몇 센티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그녀의 고객들 역시 결혼 상대를 이런 식으로 서술한다. 루시는 곧바로 자신이 관리하는 상품 리스트를 펼쳐놓고 조건에 맞는 인물을 하나씩 체크해 나간다.
고객은 자신이 지급한 비용만큼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매우 사적이고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조건을 요구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가 나오면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결정사에 그만큼의 비용을 지급했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논리다. 실제로 루시의 상사도 그렇게 말한다. 이곳에서 연애와 결혼은 시장의 논리로 움직이는 철저한 비즈니스다.
이 시장의 규칙은 단순하지만 동시에 까다롭다. 조건이 맞고 가치가 비슷해야 거래가 성립된다. 가치가 낮더라도 미래의 가능성이 높다면 투자를 고려해야 한다. 루시는 이 논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점수를 매기고 가치를 계산하는 일에 능하다. 그녀가 매칭해 결혼에 골인한 커플도 여럿이다.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길거리를 걷거나 사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조차 무심코 사람을 대상화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을 계산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는 낮아지는 자존감이다.
루시는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는 극도로 회의적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연인을 만나며, 이미 가난에 진저리를 친 그녀는 ‘환장할 정도로 부자’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일종의 자기방어다.

그런 그녀 앞에 업계에서 소위 ‘유니콘’이라 불리는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가 나타난다. 재력, 학벌, 외모, 키, 심지어 패션 감각까지 모든 항목에서 A+를 받은 남자. 하지만 그가 택한 상태는 이 바닥에서 유능하기로 소문난 매치메이커 루시다. 해리는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선을 긋는다. 자신이 아는 시장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조합이었으니까.
하지만 해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조건들은 모두 유형자산일 뿐이라며, 자신은 그녀의 무형자산을 보고 다가왔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물질주의자와 비물질주의자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둘은 크게 다르지 않다. 루시도, 해리도 결국 데이트를 투자로 보고 사람을 자산으로 계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라고 한다면 계산의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결국 여러 차례의 만남 끝에 해리의 유려한 언변과 물러서지 않는 강단에 루시는 넘어간다. 잠시 전 남자친구 존(크리스 에반스)에게 흔들렸던 마음을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해리와의 만남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가 가장 아끼던 고객인 소피가 자신이 매치해 준 상대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연락 두절 끝에 무작정 찾아온 루시에게 소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상품이 아닌 사람이에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다.
물론 루시가 소피를 다른 고객보다 특별하게 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소피도 역시 그녀에게 고객이자 상품이었다. 열 번의 데이트가 무산되더라도 루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조건을 깎아내고, 숫자를 반올림하고, 잠재성이라는 명분으로 억지 매칭을 주선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녀가 그토록 믿었던 숫자와 수치가 결국 배신했다. B등급 딱지가 붙어있는 포장지만 보고 상품을 손에 쥐여주었다. 포장지 안에 든 게 불량품인지도 모르고.

이 사건을 계기로 루시는 번아웃에 빠지고, 해리마저 완벽한 유니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서로의 결핍을 메워줄 수 있는 존재라 믿었지만 정작 두 사람의 관계에 결핍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루시와 해리는 서로에게 유니콘이었을진 몰라도, 그들에게는 사랑이 부재했다. 조건과 가치, 잠재력이라는 계산으로는 없는 사랑을 만들어낼 수도, 부족한 사랑을 채워줄 수도 없다. 그런 물질적인 가치는 사랑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루시는 끝내 해리와 이별한다. 계산을 내려놓아야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은 그녀가 돌아간 곳은 경제적 조건이 부족한,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는 전 남자친구 존이다. 루시의 과거 행적으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은 결국 이성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항복'과 '기적'

셀린 송 감독의 인터뷰 중 사랑을 묘사할 때 반복되는 두 단어가 있었다. 하나는 ‘항복’, 다른 하나는 ‘기적’이다. 얼핏 들으면 서로 반대되는 어감이다. 항복은 패배의 언어이고, 기적은 축복의 언어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은 이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지닐 수 있을까.
요즘 세대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자. 리얼리티의 하이라이트는 의외로 첫 만남도, 최종 선택도 아닌 자기소개 시간이다. 어떤 프로그램은 출연진의 자기소개만 무려 2주에 걸쳐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프로그램은 서로가 커플이 되어야만 스펙을 공개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든다. 시청자들의 관심 역시 언제나 출연자들의 화려한 스펙-외모, 학력, 직업, 연봉-에 꽂혀 있다. 그러나 이 장르에서 반복되는 클리셰는 대개 비슷하다. 출연자들은 온갖 조건을 따져보고도 결국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택한다. 사랑 앞에서 모든 전제와 통제는 무용지물이다. 셀린 송 감독의 ‘사랑은 항복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수많은 계산을 제쳐둔 이성의 언어로는 불가능한 선택. 그래서 사랑은 ‘기적’이라 불릴 만하다.
영화 속 루시는 해리에게 ‘데이트와 결혼은 어렵지만, 사랑은 쉽다’고 말한다. 사랑이 가장 어렵다는 그에게 루시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답한다. 현대 사회에서 데이트와 결혼은 점점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한다.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운동으로 몸매를 가꾸거나 시술로 더 나은 외모를 갖춘다. 그렇게 연애 상대를 찾으면 기념일마다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야 하고, 결혼식은 많은 비용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은 계산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부유한 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가난한 이에게도, 가진 것이 없는 이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 누구든 사랑할 수 있으며, 누구든 사랑받을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태초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랑했을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무엇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시간이 흐르고 사회는 변했지만, 사랑만큼은 늘 우리의 곁에 만연한 것이었다. 그 어떤 시장의 논리에도, 자본의 체제에도 잠식되지 않는 고유한 것. 실재하는 그 어떤 물질보다도 더 실재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여전히 사랑을 믿고 꿈꾸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