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른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은 많은 아이가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 안 가 ‘유년이 아닌 세상’으로 밀려난다는 것을 일찌감치 실감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아이는 드물지 않을까. <데미안>의 주인공이자 고작 10살 먹은 싱클레어는 그런 아이다. 어린 싱클레어는 두 개의 세계를 감각한다. 하나는 그의 양친이 제공하는 울타리 속 ‘안전하고 밝은 유년의 세상’이요, 다른 하나는 그 울타리로부터 멀지 않게 있는 ‘저속한 말투와 죄 지을 위험과 성적인 것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세상’이다. 그는 안전하고 포근한 유년기에 여전히 머무르고 싶어하면서도 그 너머의 세상에서 알 수 없는 끌어당김을 느낀다.
불량한 소년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혀 두 번째 세계로 목줄이 잡혀 끌려가던 즈음,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또 다른 소년을 만나 위험에서 풀려난다. 싱클레어보다 두 살 가량 많은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신비로운 미소년이다. 사람들은 데미안에게 다가가기를 어려워한다. 그의 배경에 소문이 많은 걸 차치하고도 그에게 흐르는 분위기가 아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 또한 데미안이 처음부터 보이는 호의에도 불구하고 몇 년 후 견신례 수업에서야 데미안과 막역한 사이가 된다.
견신례에서는 세례를 받은 신자가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됨을 확인한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로서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업이지만 싱클레어는 데미안과의 대화에서 다른 추구를 수혈 받는다. 빛과 로고스, 선함만을 가리키는 신이 아니라 선악 모두를 가진 신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의 의무란 자기 자신을 향해가는 것뿐이라는 발언 등이 싱클레어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온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세상의 신비를 알아 시간이 멈춘,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자연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데미안과 헤어진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과 만나기를 거부하며 방황한다. 그는 무심코 본 소녀 베아트리체를 성역화하며 숭배함으로써 전의 비행-음주와 방종-을 멈춘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꿈의 연인의 얼굴로 데미안과 닮은 중성적인 여인의 얼굴을 그린다. 그리고 꿈에 사로잡혀 ‘지구라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금빛 매’를 그린다. 싱클레어는 다시 스승 데미안을 갈구하며 금빛 새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내고, 데미안으로부터 불가해한 방식으로 답신을 받는다. 답장에 쓰인 신 아프락사스에 대해 궁금해하다 우연히 알게 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스승으로 삼게 된다.
후일 스승과 지향점이 다른 것을 알게 된 싱클레어는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그와의 우정을 종결시킨다. 스승에게 상처 입히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싱클레어는 비로소 자신의 이마에 데미안이 말하던 ‘카인의 표지’가 있음을 깨닫는다. 대학 진학을 앞둔 싱클레어는 어른이 된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과 그 어머니인 에바 부인의 집에 초대 받는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가 꿈속에서 줄곧 보아 온 꿈의 연인이다. 그녀는 선과 악, 성과 속, 여성과 남성, 이성과 충동, 질서와 혼란이 모두 한몸인 여성이다. 에바 부인은 모성의 원천이며, 세상 모든 것의 원천, 즉 자연의 의지의 근원이다. 그녀는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들의 신 아프락사스이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숭배하던 때와는 달리 에바 부인에게 정신적 사랑과 성애를 모두 느낀다. 젊은 싱클레어를 방황하게 만들었던 사랑의 두 가지 측면, 세상의 두 가지 측면이 에바 부인의 앞에서 합일을 이룬다.
데미안이 꿈을 꿔 예감한대로 세상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파괴의 진통을 겪기 시작한다. 큰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기존의 공동체가 무용해질 정도로 전례 없는 세상이 되면 사람들은 ‘경험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길목을 지나게 될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 들여다 보며 새로운 생각을 틔워 오던 데미안과 싱클레어 같은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들은 이때를 위해 세상의 기존 교리와 규칙에 구애 받기를 거부한 것이다. 사람들이 지날 길목에 먼저 도달해 서 있기 위하여. 인류의 존속과는 상관 없이 그 길목에서 사람들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이끌 수 있도록. 청년 데미안과 싱클레어도 영장을 받고 군인으로서 전장에 나간다.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다시 만나길 희구하던 싱클레어는 아프락사스의 환영을 보다 총탄을 맞고 부상병으로 이송된다. 이송 장소에서 데미안을 만난 싱클레어는 자신이 이윽고 그와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느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데미안>은 구간 별로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듯했다. 싱클레어가 유년기의 첫 붕괴를 느끼다 표면적으로 다시 안정을 찾는 부분까지는 아동의 발달 단계 양상을 소설로 써 둔 것만 같았다. 부모에게 비밀이 생기며 혼자 되는 감각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부모로부터 분리된 자아를 갖기 시작하는 과정이 잘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인 내가 싱클레어와 함께 데미안이 자연의 신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면서 도서 <데미안>은 다른 색을 보여준다.
<데미안>이 여타 성장 소설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데미안>은 인간의 의무가 정해진 성장 소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러 작품에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여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찾는’ 교훈을 전달 받는다. 헤세는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들’로 범위를 한정하여 세상에 자기 자리를 내는 것 대신 끝없이 자기 자신으로 파고들 것을 성장의 본위로 삼고 있다. 싱클레어는 세상에 보급되어 저항 없이 통용되는 이치를 손쉽게 내면화하고 살 수 없는 자신에 때로는 우월감을 느끼고 더 자주 결핍-남들과 다르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의 말처럼, 한번이라도 거리의 세인들과 다른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 그리는 살 수 없다. 성장의 이유이자 지향점이 좁게, 남다르게 정해진 이 성장 소설은 그래서 더더욱 관념적이다.
싱클레어가 인간 개개인의 의지가 아닌 자연의 의지라는 신비에 귀의하기로 정한 후 나는 싱클레어의 떨림과 흥분, 심장 고동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이제 이 책은 성장 소설을 넘어 주인공이 신비를 목격하고 신비에 복무하는 장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독자도 같이 뛰어다니는 체험서가 되었다. 특히 싱클레어가 에바 부인을 만나기 위해 데미안 모자의 집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나는 독자로서 읽는 속도를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싱클레어와 비슷한 빠르기로 움직여 어질거리는 상태로 에바 부인의 앞에 서야 했다.
에바는 성경의 하와를 라틴어로 번역한 이름이고 이브는 하와를 영어 번역 이름이다. 에바 부인은 인류 최초의 여성 이브인 셈이다. 성경에서 이브의 후손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데미안>에서 선악을 모두 가진 신 아프락사스로 존재하는 이브는 인류에게 원죄를 안긴 인물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이다. 이는 인류 재생산의 의미뿐만이 아니다. 인류가 하는 모든 사유와 통찰이 아프락사스인 에바 부인에게서 나와 에바 부인에게로 돌아가 흡수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그를 떠난다. 그러나 나는 사실 <데미안>을 두고 피스토리우스처럼 읽기를 좋아한다. 나 또한 피스토리우스처럼 종교적 형식이 있는 삶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신화적, 종교적 상징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바 부인의 이름을 보는 순간, 그리고 헤세가 에바 부인이 바로 아프락사스 신임을 밝히는 순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성경과 신화 지식을 기쁘게 뒤져 보며 내가 읽은 내용을 재구성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꾼 꿈을 살아가야 하는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들’은 항상은 아니어도 필요할 때 저마다 감응할 수 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가르침을 갈구했을 때 그 필요가 데미안에게 닿았고 데미안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싱클레어를 찾아내거나 싱클레어를 자신에게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처럼. 데미안이 자신에게 침잠해 외부에 반응하기를 모두 멈추고 중요한 꿈을 꿀 때 에바 부인은 그것에 감응하며 피로함을 보인다. 뱀파이어 장르물로 따지면 순혈 뱀파이어가 자신에게 종속된 뱀파이어에게 큰일이 생기면 타격을 받는 것과 비슷한 설정이다. 신화로 생각하자면 카인의 낙인을 가진 자들은 에바 부인이 허락한 자신의 아바타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바는 자신의 후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식 카인들을 찾아 정신적으로 가까이 두고 관리하며 그들에게 생각할 것을 주고 그들이 통찰한 것을 회수한다. 어차피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기존의 종교와 공동체가 대응할 수 없는 유례 없는 세상이 올 때 그것은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할 카인들의 지침이 될 테다.
이로 인해 데미안은 물론이고 싱클레어도 사유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결국 자신들의 신 아프락사스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이야기의 끝으로 갈수록 싱클레어가 자아가 희미한 지적 군집체에 흘러들어가는 듯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이는 설정 상 자연스럽다. 그러나 싱클레어 개인의 열렬한 맥박을 따라오던 독자로서는 그 맥박의 몰개성화에 마음의 온도가 가라앉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결말부에서 데미안의 육신이 죽고 데미안으로부터 에바 부인의 키스를 받은 싱클레어는 이제 자신의 분신이었던 데미안과 다름 없는 존재로 변했다고 보았다. 번역가인 전혜린은 해설에서 결말을 싱클레어의 죽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결국 싱클레어는 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 싱클레어 역시 죽은 셈이다.
에바가 등장한 순간부터 나는 <데미안>을 마치 피스토리우스처럼 읽기 시작했으나 이는 사실 헤세의 의도와는 맞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자기 자신에 파고들기에는 상징이라는 지적 유희의 도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카인의 후예들처럼 기존의 산물에서 벗어 난 사고를 할 수는 없다 하여도 나는 상징과 도상의 세계에 머무르며 새 이야기를 짓는 삶이 좋다. 카인의 표지를 가지기에는 솔직히 소설 초반부에서 데미안이 카인을 두고 하는 말들이 와닿지 않기도 했고, 모두가 헤세의 카인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미안>을 읽는 동안 어떻게 이 복잡다단한 재료(오랜 시간 숙성된 사유)를 가지고 이렇게 빼어나게 다룰 수 있는지를 신기해했다. 한편 이 책을 읽는 동안 평소 머릿속에 떠다니던 커다란 질문이 존재감을 더 키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그러지 못 했었는데 다시금 니체의 말처럼 ‘질문을 살아가는’ 상태로 마음이 조정되었다. 번역가 전혜린의 해설을 읽으며 ‘상반된 두 가지 세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에 대한 헤세의 꾸준한 탐구를 엿볼 수 있었다. 해설 속 그의 다른 작품 소개를 보며 헤세 월드를 모르고 살면 내 손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는 헤세의 작품을 한 권씩 독파해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