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뮤덕들 사이에서는 흔히 '치킨홀'로 불리는 곳에 뮤지컬 '마리 퀴리'의 사연이 개막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여성인 동시에 폴란드인으로서 고난을 겪었던 마리 퀴리가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의 노력과 고뇌, 그리고 수상 이후의 모습을 실제 역사와 풍부한 상상력을 합쳐 무대 위에서 선보인다.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 프로듀서상, 극본상, 작곡상, 연출상 5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그 완성도를 입증해냈고, ‘바르샤바 뮤직 가든스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인 ‘황금물뿌리개상’까지 수상한 뒤 영국 더 오피스 어워즈 튜 뮤지컬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면서 해외에서까지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폴란드인도, 여성도, 노벨 수상자도, '마담 퀴리'도 아닌, 인간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뮤지컬 ‘마리 퀴리’는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이하 마리)가 딸 이렌 퀴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차별을 받고, 라듐을 발견한 뒤 유해성이 드러난 이후의 시간들까지 마리는 자신이 지나온 여정을 차분히 되짚는다. 관객들은 이렌의 시선을 따라 기차에 발을 디디고 마리가 과거로 향하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뮤지컬 ‘마리 퀴리’는 과학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다루고 있음에도, '마리'의 생애가 더욱 무대 위에 선명하게 드러낸다. 공연 전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리가 지닌 인간적인 면모였다. 무대는 단지 시간의 흐름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재했던 마리의 순간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관람객들은 단순히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자', '최초 두 분야 노벨상 수상자' 등의 업적 나열에서 벗어나 복잡한 감정과 판단의 경계에 서 있던, 한 인간으로서의 마리를 마주하게 된다.
뮤지컬을 보는 동안 과학에 대한 흥미와 몰입, 실험의 작은 진전에도 행복한 감정을 드러내는 마리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장벽에 직면한 마리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외로워 보였다. 마리의 찬란한 업적이었던 라듐이 방사성 물질이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나갔음이 밝혀지며 자신의 연구 결과가 타인의 고통으로 이어졌다는 괴로워하는 마리의 모습은 과학의 윤리적 책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관람자의 몰입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이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갈팡질팡 고민에 빠린 마리의 입체적인 면모가 뮤지컬 내내 지속되며 단순 위대한 과학자로 이야기 되는 인물이 얼마나 복잡하고 깊이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학문을 향한 열정과 성취, 그로 인해 감당해야 했던 결과와 책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태도는를 따라가며, 관람객들은 위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마리를 기억하게 된다. 그녀는 오롯이 자기 선택과 그 결과를 감당하며 고뇌 속에서 살아갔던 한 개인이자, 과학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사유의 주체로 무대에 존재한다.
단순한 연인이 아닌 든든한 동반자이자 한 과학자, 피에르 퀴리
콘텐츠를 보다 보면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 있다. 특히 성장 서사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종종 맥락 없이 삽입된 연애 서사는 중심 인물의 삶을 단편화 시키곤 한다. 마치 여성 주인공에게는 반드시 로맨스가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듯, 설득력 없는 관계 묘사는 오히려 그 인물의 다층적인 정체성과 내면의 변화 과정을 흐리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는 장면만이 유독 강조되는 그 구조 안에서 관객은 ‘한 사람의 삶’보다 ‘사랑의 전개’에 집중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구조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 피에르 퀴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다소 익숙한 서사를 예상했다. 천재 과학자와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이라는 전형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예상의 흐름을 처음부터 빗나난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로맨스 중심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동등하게 이해하고 지지하는 ‘파트너’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여성 주인공의 서사가 연애 감정에 종속되지 않고, 인물 간의 신뢰, 협력, 공동의 목표가 중심 서사로 기능한다.
뮤지컬 속 피에르 퀴리는 단지 ‘사랑의 대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는 마리가 흔들릴 때마다 곁을 지키고, 제도와 편견의 벽 앞에서 그녀가 ‘과학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동료로 그려진다. 그의 존재는 연민이나 보호, 혹은 매혹적인 사랑과 관능보다는 오로지 ‘신뢰’에 기반하고 있으며,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연애를 넘어선 협업과 연대의 서사로 구성된다.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도, 과학의 즐거움과 함께 나아가는 이들의 ‘목표의 일치’가 더욱 관계를 굳건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노벨상 수상 장면이다. 극 중에서는 마리의 이름이 누락된 채 피에르만 호명되자 실망하는 마리에게 피에르가 위로를 건네고, 수상 소감을 그녀에게 양보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역사 속 피에르는 위로에 그치지 않고, 마리의 이름을 수상자 명단에 공식적으로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마리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파트너를 격려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기록 속에 그녀의 이름이 정당하게 남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세상에 부딪힌 결과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콘텐츠에서 보는 스킨쉽과 질투를 넘어서서, 이런 진정한 지지와 연대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만들어준 지점이다.
또한 마리가 방사능의 유해성과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점에서도 그의 '사랑'은 드러난다. 그녀가 실험의 위험성을 자신의 몸으로 입증하고자 할 때, 피에르는 이를 만류하며 대신 자신이 실험 대상이 되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실험에 내어주었고, 그로 인해 한쪽 다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이후 사고로 삶을 마감한 그 순간까지도, 그는 마리의 연구를 지원해주고자 하는 삶의 반려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방사능 부작용의 가장 큰 피해자, 라듐 걸즈를 대표하는 창작 캐릭터 안느
라듐은 스스로 빛을 내는 성질을 지닌 원소다. 어둠 속에서도 발광하는 이 물질을 발견한 마리는 과학의 발전을 이끌 수 있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암을 치료하며 인류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라듐의 유해성이 밝혀지기 전, 이 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뤘던 이들이 먼저 그 숨은 그림자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이들은 이른바 ‘라듐 걸즈’로 알려진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라듐 걸즈는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시계 공장에서 야광 물감을 이용해 숫자와 눈금을 그리는 작업에 투입된 이들이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섬세한 필체와 손기술을 요구하는 작업 특성상 고용되었다. 이들이 일하던 작업장은 라듐 먼지로 인해 벽, 작업복, 심지어 노동자의 몸과 얼굴까지 빛을 띠었기에 초기에는 마치 요정 내지 천사라는 별명까지 얻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겉으로는 찬란했던 그 환경의 이면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내재해 있었다. 당시 정밀한 붓 끝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립 포인팅’이라 불리는 작업 방식을 사용했다. 붓을 입으로 다듬은 뒤 다시 라듐 물감을 찍어 작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이는 라듐을 직접 체내에 반복적으로 축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라듐이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라듐을 함유한 치약, 화장품, 음료, 의약품 등이 대중적으로 유통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라듐에 노출된 채 일상을 이어갔다. 시간이 흐르자 라듐 걸즈는 건강 이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사망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잇따랐다. 원인을 알 수 없던 이 질환은 매독 등 사회적 낙인이 있는 병명으로 은폐되었다. 이에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를 사회적으로 증명하고자 법정 투쟁에 나섰고, 이 사건은 이후 산업재해 인식의 전환점이자, 노동자 안전보장 제도의 출발점으로 기록되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고, '안느'라는 캐릭터를 통해 상징적으로 무대 위에서 조명한다. 안느는 마리의 연구를 지지하며 후원자의 공장에서 라듐을 다루는 노동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반복적인 노출 끝에 안느는 동료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자신 또한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병의 원인이 ‘매독’이라는 왜곡된 진단에 분노함과 동시에 마리가 과학적 진실과 후원자 간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안느는 자신의 목소리를, 즉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세계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다.
안느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안느가 극단적 선택을 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려고 할 때 극적으로 마리와 화해하는 장면을 이야기하겠지만, 라듐의 유해성을 입증하기 위해 마리가 실험용 생쥐에 방사능을 노출시키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무대 위에서 '생쥐'로 표현되는 존재들이 안느와 동료 노동자들에 의해 연기되는 이 연출은 관람객에게 무대 위 장면이 단지 상징이 아니라 실재했던 역사이자, 과학적 탐구와 산업 구조 속에서 실제 인간이 실험 대상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과학적 발견의 영광에 무작정 중심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이 사회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고, 누군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빛과 그림자, 이상과 현실, 신념과 책임의 간극을 감추지 않고 관람객에게 묻는다. 그토록 찬란하다던 라듐을 뒤로하고 진정한 ‘빛’은 무엇이며, 그 빛은 누구를 비추고, 누구를 사라지게 만드는지 말이다.
마무리 지으며
뮤지컬 '마리 퀴리'는 과학의 찬란한 발견과 그 이면에 존재했던 고통을 동시에 무대 위에 올린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한 위인의 삶을 경외의 시선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결국 하나의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바로 과학도, 삶도, 역사의 진보도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언이 아니라, 마리 퀴리라는 인물의 선택과 태도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