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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가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혹은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을 때—우리는 가끔 이름을 숨기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보고 싶어진다.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종종 너무 개인적인 것이어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동시에 가려야 할 필요성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이름 바꾸기'는 어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중요한 방식이 되곤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예술을 확장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데미안>을 발표한 헤르만 헤세, 곡의 느낌에 따라 필명을 다르게 쓰며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한국의 작사가 전간디 등이 있다. 데이비드 보위는 곡에 따른 각각의 페르소나를 만들어 그에 맞는 다양한 스타일링과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하나의 얼굴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선보이는 예술가를 한 명 소개한다. 바로 현대 전자음악계의 거물이자, IDM(Intelligent Dance Music) 장르의 아이콘과도 같은 아일랜드계 영국인 음악가인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이다.

 

 

 

Aphex Twin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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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펙스 트윈은 앞서 언급했듯 현대 전자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본명은 리처드 데이비드 제임스(Richard David James)로, 그는 가장 잘 알려진 활동명 ‘에이펙스 트윈’을 포함해 15개의 다른 가명을 사용한다. 그는 굉장한 다작의 뮤지션이기도 한데, Aphex Twin이라는 이름으로 낸 앨범 외에도 다양한 활동명으로 발매한 앨범들, 그리고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린 미공개 곡들까지 포함하면 그가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음악의 총량은 매우 많다.

 

그는 11살 때부터 컴퓨터를 가지고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TV 신호의 노이즈나 기계음 소리에 매력을 느꼈다는 그는 13살 무렵 러닝타임이 100시간에 달하는 곡을 만들며 일찍이 음악적 천재성을 드러냈다. 한편, 그는 대학에서 전기·전자공학과를 전공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그가 선보이는 독특한 전자음악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토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1989년에 펍에서 함께 DJ 생활을 하던 그랜트 윌슨클래리지(Grant Wilson-Claridge)와 협업해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한 후, 첫 테크노 싱글인 ‘Digeridoo’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본인이 14세였던 1985년부터 20세였던 1992년까지 제작 및 녹음한 앰비언트 뮤직을 모은 앨범이자, 현재도 테크노와 앰비언트 장르를 대표하는 명반으로 평가받는 'Selected Ambient Works 85-92'를 발표하였다. 그 때부터 에이펙스 트윈은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전자음악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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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Come to Daddy' 앨범 표지

 

 

에이펙스 트윈은 자신의 얼굴을 기괴하게 변형하거나 합성한 앨범 표지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이는 수많은 패러디와 리메이크를 탄생시키며 서구권에서는 일종의 밈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단지 “재밌어서”,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오기 때문에” 자기 얼굴을 앨범 커버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특유의 무심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는 그의 음악 세계와 맞물려 독특한 예술적 캐릭터를 형성한다.

 

 

 

그의 음악은 왜 특별한가?


 

‘앰비언트(Ambient)’ 뮤직은 신시사이저를 통해 최소한의 음을 활용하여 공간감을 형성하는 명상적 성격의 음악 장르이다. 에이펙스 트윈은 엠비언트 뮤직 장르를 바탕으로, 비정형적 멜로디와 치밀하고 정교하게 계산된 리듬 등을 더하여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대중에게 생소했던 앰비언트 뮤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물론 그는 앰비언트 외에도 드럼앤베이스, IDM 등 전자음악 내의 다양한 장르를 실험적으로 선보였다.

 

음악을 수식하는 단어들만으로는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에이펙스 트윈의 음악을 함께 들어보자.

 

 

1. Flim



 

 

에이펙스 트윈의 유명 EP ‘Come to Daddy’에 수록된 ‘Flim’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대표곡 중 하나다. 본 EP에 수록된 곡들 가운데 가장 밝고 서정적인 곡이며, 몽롱하면서 따뜻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현악기와 피아노 선율, 그리고 그에 어우러지는 빠른 드럼 비트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다. 에이펙스 트윈의 곡 중 필자의 ‘최애’ 곡이기도 하다.

 

 

2. Xtal


 

 

에이펙스 트윈의 명성을 드높여준 정규 1집 'Selected Ambient Works 85-92'의 첫 번째 트랙인 ‘Xtal’은 감각적인 음향과 신비로운 음성의 보컬과 층층이 쌓이며 느껴지는 황홀한 공간감이 특징이며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이 곡은 에이펙스 트윈의 곡 중에서 매우 대중적인 편에 속해, 위의 ‘flim’과 함께 에이펙스 트윈에 입문하고 싶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이다.

   

 

3. Girl/Boy Song


 

 

그의 본명을 딴 앨범명을 지닌 정규 4집 앨범 ‘Richard D. James Album’의 9번째 트랙인 ‘Girl/Boy Song’은 제목과 청아한 현악기 소리 덕분인지 에이펙스 트윈의 음악 중 유독 귀엽고 행복한 느낌이 짙게 느껴지는 곡이다.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앨범 표지와는 매우 딴판인 분위기다. 빠르고 잘게 쪼개진 리듬은 소녀와 소년의 예민하고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듯 들리기도 한다.

 

감상자가 ‘Girl/Boy Song’을 듣고 ‘이것이 에이펙스 트윈이구나’ 하며 감탄에 젖어있을 때쯤,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Logan Rock Witch’를 듣게 된다. 반면 이 곡은 개그 만화나 게임에서 등장할 법한 뿅뿅거리는 효과음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장난 같은 곡이어서, 앞선 트랙의 여운을 무너뜨리고 에이펙스 트윈에 대한 어떤 속단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그는 하나의 정서에 머물지 않으며, 청자의 예상을 끊임없이 비틀고 넘는다.

 

‘Girl/Boy song’은 정규 4집 발매 전 발매된 ‘Girl/Boy EP’에서의 곡을 편곡해 다시 앨범에 담은 것이다. ‘Girl/Boy EP’의 앨범 표지는 에이펙스 트윈이 태어나기 전 사망한 그의 형의 묘지를 촬영한 사진이다. 에이펙스 트윈의 어머니는 죽은 형의 이름이었던 James를 그대로 물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에이펙스 트윈은 한 인터뷰에서 정규 4집에 대해 ‘이 앨범은 죽은 형에 대한 헌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보아, ‘Richard D. James Album’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음향적인 측면에서 탐구한 앨범이라고 읽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Girl/Boy Song’을 비롯한 다른 트랙들을 들으면 에이펙스 트윈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며, 일반적으로 차갑고 기계적이라고 인식되는 전자음악에서 여러 가지 서사와 따뜻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April 14th


 

 

에이펙스 트윈의 정규 5집 ‘Drukqs’에 수록된 곡으로, 피아노 멜로디 외의 다른 소리는 포함되지 않은 미니멀한 연주곡이다. 정규 5집은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우며, 수록곡 간의 유기성이 없이 매우 다른 형식의 음악으로 구성된 데다 총 30곡이 수록되어 러닝타임도 매우 길다. 이에 따라 에이펙스 트윈의 앨범 중 가장 난도가 높은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April 14th’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갖고 있어 여러 매체에서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

 

여담으로, 같은 앨범에 수록된 곡 ‘QKThr’은 최근 릴스 등의 숏폼 채널에서 배경음악으로 다수 사용되었다. 이 곡을 듣고 익숙함을 느낄 독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곡은 숏폼의 영향인지 국내 음원사이트에서 에이펙스 트윈의 곡 중 재생 횟수 상위권에 올라와 있다.

 

 

5. minipops 67 [source field mix]


 

 

2014년 발매한 여섯 번째 정규앨범 ‘Syro’의 시작을 여는 첫 번째 트랙인 ‘minipops 67 [source field mix]’는 다채로운 음향과 정교한 짜임새, 순식간에 변화하는 곡의 전개로 듣는 이의 귀를 한 시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곡이다. ‘Syro’는 에이펙스 트윈이 13년 간의 긴 공백기를 가진 후 발매한 앨범으로, 이 앨범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재능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는 평가를 보냈다.

 

 

 

예술가는 왜 얼굴을 숨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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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바이닐 38트랙을 합친 컴필레이션 앨범 'Music From The Merch Desk (2016-2023)' 표지

 

 

에이펙스 트윈이 음악에 관해 이야기함을 꺼리는 것, 자신의 얼굴을 변형시키고 여러 가지 활동명을 사용하며 신원을 숨기는 것 등은, 결국 자아를 하나로 고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예술가의 면모이자 ‘예술은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다’라는 고전적 믿음을 거부하는 태도로 읽힌다.

 

에이펙스 트윈은 자신의 앨범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이런 성향을 담는다. 그의 앨범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트랙 간의 통일감보다는 이질적인 조합을 택한다. 매우 파격적인 곡의 진행과 난해한 뮤직비디오로 인해 에이펙스 트윈의 문제작처럼 여겨지는 곡 ‘Come to Daddy’와,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드럼 비트가 어우러지는 감성적인 곡 ‘Flim’이 같은 앨범에, 그것도 바로 앞뒤로 연달아 수록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에이펙스 트윈의 곡들은 제목부터 파편화되어 있다. 예컨대 정규 6집 ‘Syro(2014)’의 수록곡 제목들은 ‘4 bit 9d api+e+6’, ‘fz pseudotimestretch+e+3’ 등 뜻을 유추하기 힘든 알파벳의 나열처럼 보인다. 이러한 제목에는 보통 사용한 악기, bpm, 곡을 만든 곳의 주소, 노래 길이 등 여러 요소가 섞여 들어가 있으며 일부는 정말로 아무 의미 없이 그냥 휘갈긴 제목들도 있다고 한다.

 

에이펙스 트윈은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보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만든 소리조차 디스크에 저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창작물에 어떤 구속도 남기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는, 결국 예술과 자아의 관계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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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몇 예술가는 하나의 이름, 하나의 스타일에 갇히지 않고 여러 자아로 분화되어 살아간다. 그들이 가명을 쓰고, 여러 개의 얼굴을 만들고, 장르를 넘나드는 이유는 결국 하나의 정체성으로는 예술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아를 나누고 흩트리는 행위는 자신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다.

 

에이펙스 트윈의 작업 방식은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름을 지우고 얼굴을 뒤틀며 질문을 거듭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질문해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앞으로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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