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사라진 달리기는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복잡한 방식으로 자취를 감췄다. 사춘기의 나는 달리고 싶었지만 달릴 수 없었다면, 어른이 된 나는 달릴 수 없기 전에 달리고 싶지 않았다. 달리고 싶지 않다는 건 생각보다 큰일인데, 이 마음이 불어나면 걷기 싫어지게 되고 결국엔 영원히 누워 있고만 싶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워 있기만 하는 건 왜 또 큰일이냐면, 항상 같은 풍경을 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로 핸드폰, 때로 천장, 종종 책. 미디어와 멍때리기와 독서가 줄 수 있는 세상은 물론 광활하지만, 바깥을 모르는 사람에겐 테두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딱 액정만큼의, 벽지만큼의, 종이만큼의 시야에 갇히게 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달리고 싶지 않았다. 환한 얼굴로 결승선을 가르던 게 어제 같은데 20대 중반이라니. 제자리뛰기 하듯 10여 년을 한 번에 뛰어넘은 것 같다. 혹여 지워질까 손도 조심히 씻으며 간직했던 1등 도장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대학교 졸업이 코앞인데 결승선 너머는 캄캄하기만 하다. 선이었던 것이 비스듬히 일어나 칼이 되어 있네. 그 선을 넘으면 배가 갈릴 것만 같다. 앞머리를 택했던 날처럼 아주 안전하게 아주 무탈하게 아주 고요하게 누워 있기만 해볼까.
그런 내게 언니들은 꾸준히 러닝을 권했다. 나의 언니들은 어떤 사람인가. 어느 날 첫째 언니와 걷는데 언니가 갑자기 멈추더니 예쁘다 소리를 연발하며 무언가를 찍었다. 자동차 범퍼에 비친 노을이었다. 첫째 언니는 그런 걸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둘째 언니는 성인 남성(우리 아빠다)을 허벅지 싸움에서 우습게 이겨낸다. 컨디션 좋을 땐 밥도 두 공기씩 먹는다. 아빠는 소고기를 먹으려면 둘째 언니가 없을 때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지경이다. 요약하자면 언니들은 마음도 몸도 너무 건강하다. 그 건강함이 나로선 감당할 수 없는 규모라 언니들이 내린 러닝이라는 처방에 비뚤게 반응하곤 했다. 물론 속으로만: 언니들은 체력이 좋으니까 러닝이 재밌겠지. 난 단거리 전공이라고!
처방과 조언과 위로가 모조리 미웠다. 이미 누워 있기만 하는데도 ‘더 적극적으로 멈추기’ 버튼 따위를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생각보다 체계적이라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마다 우리의 뇌는 무언가를 슬그머니 내밀곤 한다. 내 삶을 스캔한 나의 뇌도 그랬을 것이다. 저 기억 너머에 잠들어 있는 운동장의 추억을 발견하고 먼지를 털어냈을 것이다. 그렇게 내게 달리기를 제안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받아 들고 작년 여름 나는 정말로 달렸다. 달리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내가 달리기를 유독 좋아했던 건 빨라서여도 있지만 ‘일단 하기’가 쉬워서도 있었다. 공이 없어도, 멋진 축구화를 사지 않아도, 특별한 기술을 몰라도 뛸 수 있어서였다. 오히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몸일수록 더 잘 달릴 수 있어서였다. 내 몸만으로도 무언가를 순전히 잘 해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생동감을 주었다.
달리기 위해선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건 스물넷의 내게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렇게 뛰고 싶을 때마다 달렸다. 처음 러닝한 여름밤을 기억한다. 500m만 달려도 고비가 찾아왔다. 100m 동안만 폭발적으로 힘을 쏟아내면 되는 단거리 계주와는 차원이 달랐다. 호흡이 가빠져서 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언니들이고 달리기고 뭐고 다 멈추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첫째 언니의 말을 떠올렸다. “숨만 잘 쉬어도 달리기는 쉬워져. 코로 두 번 들이마시고, 입으로 두 번 내쉬어 봐.” 그렇게 숨 쉬는 데 집중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나와 숨과 세상만이 남았다. 숨이 너무 차면 조금 속도를 줄였고, 숨이 넉넉해지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를 추월할 필요도 없었다.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작점도 결승선도 속도와 방향도 내가 정한 대로. 멈추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뛰든 상관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달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멈추고 싶었던 게 아니라 조금 천천히 뛰고 싶었던 것 같다고. 앞서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아도 조급해지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거라고. 내 숨의 리듬에 맞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그렇게 러닝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면 내일도 잘살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피었다. 내 숨에 맞게, 내 심장박동을 존중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들뜨는 기분이 만든 착각이어도 좋았다. 창밖에선 매미가 울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착각일지언정 꿈은 아닌 듯했다.
그동안 나는 100m 계주의 마음으로 삶을 살려던 건 아닐까. 1등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어쩌지 조마조마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운동회와 달리 삶이라는 코스에 1등 따위 없을지도 모른다.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이 엄청난 장거리 달리기. 천천히 뛸 줄 아는 사람이 더 멀리 갈 수 있는 모순적인 달리기. 이 요상한 달리기를 나는 정말로 잘 해내고 싶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