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제였을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 보통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그 보통의 일부라 믿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싶은 문장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헷갈린다는 게 말이 되나. 된다. 그 보통이라는 게 만들어진 허상이며 스스로에게 걸고 있는 자기 세뇌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뫼르소에게는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을 되돌아본다며 이 짧은 구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조용히 되새겨보면 ‘어라?’ 하는 순간이 온다. 주인공의 이름 '뫼르소'는 소설 초반부에만, 그것도 한두 번 정도만 등장하고 그 이후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분명 모두가 그와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어가지만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직장 동료부터, 이웃, 그리고 연인까지도 뫼르소라는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물류창고의 재고" 같은 존재가 된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인간은 존재를 인정받고 무리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오빠’나 ‘형’ 같은 일종의 지칭 대명사는 불특정 다수를 한데 묶은 호칭이다. 나를 오빠라고 부른 저 사람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 지인의 대다수를 같은 단어로 부른다. 나는 그 개체군에 속한 하나일 뿐이다. 이름은 다르다. 그 사람이 나를 이름으로 부를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오롯이 나 하나다.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뫼릐소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집단의 일부, 혹은 기능의 담당자로 취급받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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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와 주변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정보의 교환일뿐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언어도 알지 못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나라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상황과 같다. 그들은 같은 어로 말하고 있지만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완벽히 분리되고 격리된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뫼르소는 자신의 행동과 동기를 설명하려 하지만, 법관과 배심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신을 믿지 않는 불경한 존재라는 것에만 집중한다. 사회는 개인이 어떠한 특성을 가졌는지는 개의치 않고, 그 틀에 맞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만 집중한다. 그 틀에서 벗어나 있는 뫼르소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뫼르소는 정직하다. 그는 사회적 기대나 관습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조작하지 않는다. 슬프지 않은데 슬픈 척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데 후회하는 척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들어갈 조각이 아님에도 힘으로 욱여넣고 만족하려는 사회에 저항하는 단단한 퍼즐 조각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대신 저 멀리 구석으로 던져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간다. 직장에서는 성실한 직원으로, 가족 안에서는 책임감 있는 구성원으로, 사회에서는 모범적인 시민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건 사회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이 맞춰진 모습이지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뫼르소는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아가기 위한 대가로 완전한 소외와 고립을 지급한다.
뫼르소의 경험이 전혀 낯설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방식으로 이방인의 삶을 경험을 하고 있다.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소셜미디어의 가상적 연결 속에서, 경쟁 사회의 개인주의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특히 팬데믹을 경험한 세대에게 이방인의 감정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물리적 거리두기는 우리를 문자 그대로 타인으로부터 분리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은 소외감을 경험했다. 화상회의 속 네모난 창들은 마치 감옥의 면회실 같았고, 우리는 모두 뫼르소처럼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죄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반드시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뫼르소가 죽음 앞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듯이, 우리도 소외와 고립의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의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왜 이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으냐며, 당신들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라며 불평을 늘어놓지만 누고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을 때 그 부재를 실감한다.
『이방인』을 덮으며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이방인이라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관계와 자아실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뫼르소의 이름이 소설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점점 더 익명의 존재가 되어간다. 하지만 이것이 절망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다. 진정한 해답은 이방인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도 진정한 연결을 추구하는 것이다. 뫼르소가 죽음 앞에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듯이, 우리도 소외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인간관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 우리를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우리도 타인을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말로 이방인의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시작점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은 현대인의 보편적 조건이다. 하지만, 이 외로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만남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조건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람됨의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