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영문 소설을 탐독하다 보면, 시대, 종교, 사랑, 계급에 대한 익숙한 톤과 서사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쿠체의 <포>는 존재하는 형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신선했고,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어떤 작품보다 불친절했으며 그 불친절함이 그다지 위트 있거나 열려있지도 않았다. 대충 지나치고 넘겨버리곤 했던 문학적 ‘헷갈림’이 몸집을 부풀려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넌 더 파고들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이야기는 특정 지을 수 없고 정체화할 수 없는 뒤섞인 목소리로 전개된다. 쿠체의 <포>는 현실과 상상, 권력의 유지와 전복, 무한한 가능성과 한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독자들을 영원한 미궁으로 이끈다. 독자의 접근과 주제넘는 해석을 거부하는 작품으로부터 기인하는 불쾌감, 그것을 원동력 삼아 끝까지 읽었다.

 

 

화면 캡처 2025-06-14 103920.png

 

 

이야기에는 고착화된 권력이 존재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곧 그럴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뜻이다.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어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방식이 다르고, 주어지는 기회 또한 다르다. 쿠체는 수잔이라는 여성 화자에게 가장 '개척자'스러운, 제국주의적인 캐릭터를 부여했다. 그녀는 문명을 상징하며, 항해 도중 배가 침몰해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섬에 발을 들인다. 이내 그 섬과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여성 화자의 채택은 그녀에게 목소리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지위와 힘을 부여한다. 개척자 수잔은 크루소(로빈슨 크루소)와 그의 노예 프라이데이에게 질문하고 지시할 권한을 가진다. 이는 과거 개척/지배 능력과 욕구가 강조되던 남성 화자 중심의 식민주의적 문학과 완전히 대비되는, 쿠체의 독특한 선택이다. 바다를 항해하던 중 떠밀려 와 문명의 시각으로 섬을 개척해가는 여성. 쿠체는 시작부터 전례 없는 캐릭터 설정을 선보인다.


포는 권력 관계의 전복에 대한 여지를 남겨둔 채로, 또다시 가장 현실적인 한계로 수잔을 애태운다. 그녀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인 다니엘 디포, 즉 ‘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해달라고 끊임없이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포에 의해 재해석되고 가공되지 않는 한 출판될 수 없다. 딸에 대해 쓰지 않으면 출판해줄 수 없다는 포 앞에서 수잔은 몇 번이고 힘을 잃는다. 정체를 찾는 여정에도 권력이 필요한 법이다.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이야기로서 증명받고자 하는 욕망은 수잔의 정체성이자 그녀가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하다. 자칭 ‘자유로운 여성’이지만, 결국 유명 남성 작가가 이야기를 출판시켜주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적인 여성의 자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편지 속에서 적극적으로 삶을 전하고자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생존을 향한 염원이 느껴져서, 응원하게 되기도 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을 섬에서의 삶이 출판된다면, 수잔은 사회적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척자로서 권력을 지닌 그녀가 원하는 ‘지위’란 조금 더 처절하고, 생각보다 소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이야기란, 기록이란 삶을 정체화해줄 훈장과도 같다.

 

 

Robinson_Crusoe_1719_1st_edition.jpg

 

 

언어로 경험을 낱낱이 되짚는 행위는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라이프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섬에서 정형화되고 체계화된 인간의 언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수잔은 기록하지 않으면 다 사라진다고 말하며, 크루소의 모험을 기록해 출판하는 것이 어떻냐는 조언을 건넨다. 크루소는 “내가 이미 잊은 것은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정제되고 규정된 언어의 힘을 완강히 거부한다. 작품 속 프라이데이라는 인물 또한 수잔과의 대척점에 서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잘린 혀뿌리 뒤로 모든 비밀을 넘겨 머금어버린 그는 혀가 잘려 말을 하지도, 글을 쓰지도 못한다. 이야기의 한계를 실험하는, 이야기의 힘이 적용되지 않는 대상 밖의 인물인 것이다.

 

수잔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선 프라이데이의 경험이 꼭 필요하지만, 그녀와 프라이데이의 대화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일절 진전하지 못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조금 보이는 듯하다가도, 포의 로브를 걸치고 가발을 쓴 채 마구 춤을 추는 그는 다시금 통상적인 이해의 영역으로부터 탈출한다. 체념한 수잔은 프라이데이와 함께 춤을 추며 발밑 건초가 따뜻해짐을 느끼고, 그를 어렴풋이 이해해본다. 그렇게 멀어짐과 가까워짐이 반복된다. 이야기를 향한 수잔의 욕망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동시에 프라이데이는 왜 응답하길 거부하는가? 책의 후반에 다다랐을 때도 프라이데이에 대한 조금의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쿠체는 프라이데이에게 표현에 대한 책무를 강요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진실을 품고 있는 자가 이야기하길 거부한다. 혀가 잘려 문장을 구사하지 못한다. 수잔이 믿는 언어와 이야기의 힘, 그 모든 것이 무력화된다.

 

 

1742927454Memoir Writing.jpg

 

 

소설은 수잔의 목소리를 빌리지만, 어쩌면 프라이데이의 표현 방식을 가장 닮아 있다. 굳이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수잔의 시각을 통해, 비밀과 진실의 영역은 끝내 저 너머에 남겨진다. 섬의 모든 것을 문명의 기준으로 이해하려는 그녀의 시선은 낯설고 폭력적인 개척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에게, 수잔이 섬에 발을 들인 그 순간이 어쩌면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침입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야기하려는 몸부림과 원치 않게 재해석당하는 수잔의 취약함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프라이데이라는 인물과의 선명한 대척점 또한 그 의도가 명확하지 않다. <포>는 그 어떤 것도 확정 짓지 않으며, 해석되기를 거부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쿠체가 직접 개입해 프라이데이의 입을 억지로 벌려보지만, 남은 것은 잘린 혀와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거품뿐이다. 교훈도, 메시지도 애초에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남기는, 그런 불친절한 문학이다. 스토리텔링의 액자와 액자, 그리고 또 하나의 액자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를 남긴다. 그리고 그 물음표는 누군가를 밤새 괴롭힐 만한 파괴력을 지닌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