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어느 날, 전공 수업 종강을 맞아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양희은의 '늘 그대'라는 노래에서, "계절이 계절로 흐르는 소리"라는 가사를 참 좋아하신다고.
나를 아끼는 법을 배워두면 그게 내 평생의 원동력이 된다고. 치열하게만 살지 말고, 계절이 계절로 흐르는 소리도 들으며 살라고. 나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예쁜 걸 보고 맛있는 걸 먹고 그러라고.
그때부터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무렵이면, 그해 그 계절의 버킷리스트를 짜는 습관이 생겼다. 3~5월은 봄, 6~8월은 여름, 9~11월은 가을, 12~2월은 겨울. 3개월 동안 목록을 조금씩 지워나가고, 못다 한 것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메모장에 보관해 둔다.
목록에 있는 내용은 다양하다. 그 계절이 지나기 전에 한 번쯤 입을 옷들, 놀러 가고 싶은 장소들, 하고 싶은 소박한 일들 등등. 하지만 항상 가장 먼저 줄줄 읊게 되는 것은 먹어야 할 음식들이다. 특히 여름은 생각나는 음식이 더 많다.
우선 냉면을 먹어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냉면 육수 특유의 맛을 참 좋아해서, 초등학생 땐 별명이 '김냉면'이었을 정도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중에서는 확고한 물냉면 파다. 돼지갈비를 곁들여 먹어도 좋고, 돈가스를 푹 담가 먹는 것도 좋아한다. 두려움 때문에 평양냉면을 아직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올해는 꼭 시도해 보는 것이 목표다.
냉우동도 필수다. 냉면 육수와는 또 다른, 시원한 쯔유의 맛이 좋다. 메밀을 별로 즐겨 먹지 않아서 소바보다는 우동을 훨씬 좋아한다. 특히 자가제면 우동 면발 특유의 쫄깃함에 빠지고 나면 인스턴트 우동은 먹을 수 없게 된다. 일식 특유의 촉촉한 튀김도 꼭 곁들여주어야 한다. 좋아하는 냉우동 가게나 냉라멘 가게는 여름마다 주기적으로 가곤 한다.
여름엔 유독 과일도 자주 찾게 된다. '딱복'과 '물복' 논쟁이 활발하지만, 나는 물복을 넘어서서 흐물거릴 정도의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가 가장 좋지만 참외, 멜론 같은 다른 여름 과일들도 좋다.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시원하고 달달한 맛에 끌린다.
어떤 과일은 음료로 먹는 게 더 편하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수박은 크기가 너무 크고 껍질 처리도 번거로워서, 그냥 수박 주스 한 잔을 마시는 것이 더 좋아졌다. 요즘은 수박 주스가 맛있는 카페 추천이 열띠게 올라오기도 한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박은 수박 주스, 망고는 망고 스무디, 자두는 자두 에이드로 선호하는 종류가 딱 정해져 있다. 자두 에이드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에서 임시완의 집착을 보고 처음 빠져든 것이 이어져 오고 있다. 영화에 나온 음식을 따라 먹는 것도 즐거운 루틴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여름에 카페를 가면 아이스 음료를 열심히 마신다. 요즘은 '얼죽아'도 많지만 나는 날이 추워지면 바로 따뜻한 음료로 옮겨가기 때문에, 더울 때 시원한 걸 양껏 마셔주어야 한다.
마지막 음식은 아무래도 빙수다. 프랜차이즈 빙수도 좋지만, 정말 맛있는 빙수 전문점에 한 번은 가야 여름을 누리는 기분이 난다. 예전에는 과일빙수만 먹었는데, 최근에는 팥빙수의 맛도 알게 되었다. 우유 얼음만 떠먹어도 진하고 맛있는, 그런 빙수를 올해도 만나고 싶다.
음식 외의 다른 버킷리스트로는 대략 이런 것들이 있다. 동네 오가는 길에 능소화 사진 찍기. 바다에 한 번쯤 발 담그기. 여름 시집과 소설을 한 권 이상씩 읽기. (올해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두고 온 여름>을 읽을 예정이다) 미뤄둔 여름 영화 보기. (우선 <남매의 여름밤>을 볼 예정이다)
교양 수업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수님의 질문에 철학적인 답변이 이어지던 중, 제주도에서 온 친구가 자신의 단골 흑돼지 집 고기 맛을 답변으로 냈던 기억이 난다. 강의실 안의 모두가 웃었지만, 사실 가장 와닿는 답변이었다. 예술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술이다!'라고 생각해 본 경험은 모두에게 있을 테니까.
올해도 그런 예술적인 여름을 보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