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라는 이름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낯익게 들려왔던 이름이다.
교과서나 뉴스, 혹은 어떤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으로 스쳐 지나갔을지라도 그 이름이 남긴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당연한’ 노동 환경과 권리들은 사실 누군가의 외침과 희생 위에 놓여진 것들이다.
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서 형태를 바꿔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기억은 지금 우리의 삶 어디쯤 머물러 있을까?
목소리로 피어난 기억, 전태일
작품은 배우의 노래와 내레이션, 실제 배우의 모습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특히 배우는 전태일을 연기하면서도 중간중간 배우 본인의 목소리로 무대 위에 등장해 하루 동안 자신을 버티게 한 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 연출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우들이 ‘인물’ 그 자체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닌 목소리를 전하는 매개체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연출이 ‘목소리 프로젝트’의 취지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고 여겨졌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구조는 그 진심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극은 전태일을 단지 ‘열사’나 ‘상징’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한 사람의 삶과 감정, 관계를 섬세히 그려낸다. 어머니와 함께 추위를 피해 마루 밑에 몸을 뉘이거나 자신의 차비를 털어 어린 시다들에게 빵을 사다주는 장면은 그의 따뜻함과 평범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내일은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분신을 결심하기 직전 예옥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 그리고 동생과의 이별을 앞두고 허공을 바라보던 장면은 말보다 강하게 관객의 가슴을 울렸다. 무언가를 각오한 사람의 침묵은 그 어떤 외침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무대는 점점 어두워지는데 그 어둠 속에서 배우들이 차례로 불을 밝히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빛을 더해간다. 그렇게 무대를 밝히는 촛불 사이에서 전태일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처음에는 작고 미약했던 불꽃들이 모여 점차 무대를 환히 밝히는 모습은 전태일이라는 인물의 성장과 결의를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듯했다. 그가 품었던 희망과 연대의 신념은 결코 혼자의 것이 아니며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지켜지고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촛불을 통해 전해받았다.
불꽃은 타오름과 동시에 무언의 책임을 건네고 있었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나는 기억되고 있습니까?
극의 마지막 순간은 그 어떤 장면보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단단하게 각인시켰다. 그의 죽음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조용히 퇴장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마지막 장면은 담담하지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죽음을 보여주지 않고도 그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연출은 침묵과 여백 속에서도 그 삶의 무게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연출의 절제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진심을 더 잘 전하고 많은 여운을 남겼다.
"나는 기억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전태일을 기억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노동 현실과 새로운 문제들 속에 살아가고 있다. 평화시장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평화시장이 여전히 존재하는 건 아닐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전태일을 기념하고 그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가 남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그 과거로부터 지금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태일을 기억한다’는 말은 오늘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조용히 켜진 불빛처럼 그의 기억은 눈에 띄지 않게 우리 곁을 맴돌고 있었다.
태일은 그것을 다시 보게 했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듣게 만들었다.